두산 베어스 김경문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자진 사퇴를 했습니다. 김경문 감독은 6월 13일 잠실구장 구단 사무실에 들러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 의사를 밝혔습니다. 구단에서 김경문감독의 사퇴를 적극적으로 만류했으나 김경문 감독은 사퇴의사를 굽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김경문 감독의 자진사퇴를 받아들인 두산 베어스는 김광수 수석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임명하고 남은 시즌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지난 몇년간 두산베어스를 강팀으로 이끌고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프로야구 30여년의 역사중 가장 빛나는 업적인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는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기에 김경문 감독의 사퇴는 야구팬들에 자못 충격적으로 느껴질거 같습니다.

김경문 감독 사퇴서 전문

저는 오늘 두산베어스 감독직에서 사퇴하고자 합니다.

올시즌 어느 때보다 구단의 지원도 좋았고 나름대로 준비도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처음 구상한 대로 풀리지 않아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사퇴하는 것이 선수들이 서로 뭉치는 계기를 만들고 새로운 분위기에 빨리 적응하여, 올시즌 포기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노력으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그만두는 오늘은 구단의 발전과 저를 위한 큰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되고, 또한 서로에게 최고의 날이 될 것입니다.

지난 7시즌 동안 두산에 있으면서 하루하루 유니폼을 입고 덕아웃에 앉아 있는 것, 그리고 선수들과 같이 그라운드에서 생활하는 것이 저에게는 커다란 행운이며 축복이었습니다.

또한 두산베어스 팬들의 사랑은 저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대단했고 그것으로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어떻게 팬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디에서 다시 야구를 하던 처음 두산에서 프로에 몸을 담았던 만큼 두산은 언제나 저에게 진정한 고향일 것이고, 두산베어스와 팬여러분에 대한 저의 관심과 사랑은 영원할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님, 박정원 구단주님과 김진사장님 그리고 그동안 저와 같이 활동한 코칭스탭, 선수단 여러분, 또한 구단프런트 여러분, 무엇보다도 언제나 한결같이 성원해 주신 팬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김경문 감독이 이끄는 두산 베어스는 올시즌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중 한팀으로 꼽혔습니다. 올시즌 초반에 SK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며 우승후보다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5월 이후부터 선수들의 부진과 부상자 속출로 성적이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습니다. 송지선 아나운서의 안타까운 사망사건도 임태훈 선수의 1군 엔트리말소와 함께 두산 베어스 팀분위기를 추락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올 시즌 좋은 활약을 펼치는 다른 팀 용병투수들과는 달리 두산 베어스 용병투수들까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두산은 수습불가능할 정도로 총체적인 난국에 빠졌습니다. 4월에 선두다툼을 벌이던 두산 베어스는 5월 한달간 8개팀중 최저 승률인 7승 17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두었고, 6월 들어서도 현재까지 3승8패로 부진한 모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김경문 감독은 6월 12일 SK전에서 0대6으로 무기력하게 완패를 당한후 경기내용에 대해 감독으로서 책임을 느낀다고 소감을 밝힌바 있습니다.

김경문 감독은 올 시즌 감독으로서 통산 500승을 거두었습니다. 감독으로서 통산 8번째 기록이고, 더욱이 두산 베어스 한팀에서 이룬 500승이라는 대기록입니다.

1990년대 하위권에서 허덕이던 두산 베어스는 2000년도 들어서 김경문 감독이 취임이후 다른팀으로 변모했습니다. 두산은 FA같은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김경문 감독의 지도아래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루어냈고, 매년 우수한 성적과 함께 관중 동원력에서 LG를 제칠정도로 두산을 인기구단이면서 명문구단으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김경문감독은 두산베어스를 2006년 한해만 제외하고는 매년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도하 아시안게임 실패 이후 야구대표팀에 비난 여론이 높아져서 유명 감독들이 모두다 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을 고사할때 김경문 감독은 야구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감독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예상을 깨고 금메달을 차지하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특유의 뚝심과 선수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김경문 감독의 용병술이 빛난 대목이였습니다.

두산 구단은 사퇴의사를 밝힌 김경문 감독이 팀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공로를 인정해서 향후 거취에 대해 본인의 뜻을 존중해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김경문 감독은 아직 50대초반에 불과합니다. 그동안 김경문 감독이 있어서 프로야구팬으로서 참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모습으로 다시 볼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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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초대 홈런왕이자 해태타이거즈 우승신화의 주역인 김봉연은 아마추어와 프로시대를 관통하는 홈런타자이다.

일본야구의 영향으로 국내에서 다운스윙이 교과서로 통했지만, 김봉연은 호쾌한 어퍼스윙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김봉연은 거포의 이미지가 강렬하지만, 연세대 시절인 73년 춘계리그 고려대전에서 투수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1977년 대학선수권에서 도루왕에 오를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아마와 프로를 이은 홈런왕

김봉연은 1952년 전주 출생으로 군산상고 시절인 1972년 황금사자기에서 '역전의 명수' 신화를 썼다.

1973년 추계리그 동아대전에서 대학야구 사상 최초로 3연타석홈런을 날리며 홈런상과 타격상을 받았고 74년 추계리그 홈런상을 수상했다.

1975년 제11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홈런왕에 오르며 우승에 공헌한 그는 육군(75~77년)을 거쳐 연세대에 복학한 뒤 투수를 포기했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회서 한국야구 최초로 세계 정상의 금자탑을 쌓을 때의 주역이기도 했다.

한국화장품(79~81년)에 입단해 3년연속 대통령배실업리그 홈런왕에 올라 김우열 시대를 종식시켰다. 특히 81년 한전과의 경기에서 3연타석 3점홈런의 진기록을 세우는 등 역대 아마추어를 통틀어 6차례 기록된 3연타석 홈런 중 절반인 3차례나 작성했다.

1982년 해태에 입단해 프로야구 원년 홈런1위(22개)에 오르며 실업시절까지 포함해 4년연속 홈런왕을 지켰다. 이때가 만 30세였다. 또한, 55득점을 올리며 득점왕을 차지했고, 자신의 한시즌 최고타율인 0.331의 고타율을 기록했다.

프로야구 원년에 올스타로 선정된 김봉연

당시 공포의 타선이였던 해태 타이거즈 KKK타선(김일권,김종모,김성한,김준환,김무종 등)중에서도 4번타자로 맹활약하며 '김봉연'이라는 이름 석자를 야구팬들의 가슴속에 각인시킨다.


사고를 딛고 한국시리즈에서의 맹활약하다

이듬해인 1983년, 김봉연은 전기리그 내내 홈런선두 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다 맞은 휴식기(올스타 브레이크)에 교통사고를 당해 얼굴부위를 무려 300바늘이상을 꿰매는 중상을 입는다. 훗날 당시의 상황에 대해 김봉연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라고 회고한다.

하지만, 김봉연은 사고 29일만에 복귀하는 놀라운 투혼을 보여주었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그의 빠른 복귀에 모든 이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복귀후 김봉연은 사고 이전과 그대로였다. 헬멧이 벗겨져 나갈 정도의 강력한 헛스윙도 다시 보여줬다.

그러나 정상은 아니었다. 펑펑 쏘아올리던 홈런포보다는 어딘가 불안한 듯한 모습이 비춰졌다. 과연 스윙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너무 무리해서 복귀하지 않았나하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1983년 해태타이거즈에는 정규시즌 20승을 거둔 '이상윤'을 비롯해서 재일동포 투수 '주동식', 그리고 김용남등 숫적으로는 부족했지만 질적으로 전혀 부족하지 않은 투수진을 보유하고 있었고, 홈런타자 '김봉연'을 필두로 '김성한', '김종모', '김일권'으로 이어지는 타선의 무게도 굉장했었다.

당시 버마(현 미얀마)에서 아웅산 폭파사건이 있어서 한국시리즈 개막이 늦춰지는 소동을 치르고 벌어진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는 MBC를 맞아 단 1승도 빼앗기지 않고 4승 1무의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이상윤과 주동식의 호투와 김성한의 적절한 안타, 그리고 김일권의 도루등 모든 선수들이 함께 일궈낸 우승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선수는 김봉연이었다. 시리즈 5게임에서 19타수 9안타 0.473의 타율과 1홈런 8타점을 올리며 맹활약을 펼친 김봉연은 특히 시리즈 3차전에서 더욱 빛났다.

그날 그는 혼자서 5타점을 올리며 펄펄 날았으며 특히 해태의 3회말 공격에서는 무사 2, 3루의 상황에서 타석에 등장해 바뀐투수 '하기룡'의 초구를 통타해 3점홈런으로 연결시켜 MBC의 추격의 의지를 완전히 꺽어 버렸다.


한국시리즈에서 19타수 9안타 0.478의 타율에 1홈런, 8타점으로 단연 최고의 활약을 보이면서 시리즈 MVP에 수상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너무나 화려한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신화의 서막을 올린이가 바로 김봉연이었던 것이다.

김봉연은 목숨을 일을뻔 했던 사고를 극복하고 그해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는 감동의 드라마를 팬들에게 선사한 것이다. 그가 수상한 시리즈 MVP라는 감투보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가 훨씬 돋보였던 순간이였다.

그해 김봉연은 '홈런왕'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또 다른 수식어를 얻게된다. 그것은 바로 '콧수염'이었다.

1983년 교통사고를 당해 무려 300바늘 이상을 꿰맨 영광의 상처가 코밑에 자리잡자, 그는 상처를 가리기 위해 콧수염을 길렀다. 당시에는 콧수염을 기르고 대중들 앞에 서는 이를 보기가 어려웠던 만큼 그의 콧수염은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물론 교통사고가 나은 부산물이라는 사실도 어느정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

아무튼 김봉연이 기른 콧수염은 너무나도 그에게 어울였고 그를 더욱 강인하게 인식하게 했다. 거기에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콧수염을 휘날리며 호쾌한 타격을 보였던 그의 모습은 콧수염을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부터 김봉연은 콧수염을 말끔히 자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단지 한 시즌의 절반만을 콧수염을 기른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다음 두시즌 그는 평범한 성적만을 보이고 만다. 타율은 2할 4,5푼대에 머물고 홈런수도 똑같이 17개씩만을 기록한다. 물론 그렇게 나쁜 성적은 아니었지만 82, 83년의 활약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김봉연의 콧수염이 삼손의 머리카락 역할을 했던 것일까?

하지만, 김봉연은 86시즌이 시작되자 다시 예전의 강력한 타자의 모습을 재현하며 원년에 이어 두 번째로 홈런왕에 오르게 된다.


불붙은 100호 홈런경쟁

1986시즌은 홈런왕 타이틀보다 프로최초 100호 홈런의 주인공이 누가 될 것인가가 팬들은 물론, 본인들에게도 더욱 큰 관심사였다.

1980년대 홈런왕을 양분했던 김봉연과 이만수

1985시즌이 끝나고 김봉연은 통산 78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었고, 이만수는 통산 85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었다. 김봉연이 22개, 이만수가 15개가 부족했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돼자 둘의 홈런수는 역전이 됐고 김봉연선수가 99호에 먼저 도달하게된다. 이때, 이만수의 홈런수는 92개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김봉연은 '마의 아홉수'에 걸린 듯 주춤하게 되고 이만수의 맹추격이 시작된다. 마침내 둘의 홈런수는 99개로 동률을 이루고 당시 야구계의 최대이슈로 떠오르게 되고, 마침 '일간스포츠'에서는 최초의 100호홈런 주인공에게는 '프라이드'승용차를 경품으로 지급한다고해서 둘의 100호 홈런 경쟁은 피크를 이룬다.

결국 9월 2일 삼성의 '이만수'는 빙그레 천창호로부터 1회말 선두타자 초구홈런(시즌 15호)을 뽑아내며 프로야구 최초의 100호 홈런을 기록한 선수로 야구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허탈해진 김봉연은 그해 끝내 홈런 하나를 추가하지 못하고 21개의 홈런으로 시즌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한데 만족해야 했다.아울러 67개의 타점으로 타점왕을 차지하면서 2관왕에 올랐다.

다음해인 1987년에 와서는 전년도의 100호 홈런경쟁에서의 패배 때문인지 시즌이 시작한지 한달쯤 지난 4월 2일에야 홈런을 추가할 수 있었고, 데뷔후 처음으로 10개미만의 홈런을 기록하며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후 1988년에도 그다지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자, 체력적인 한계로 인해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코치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 만 37세였다.


1989년부터 해태의 코치직을 맡게된 김봉연은 왕년의 홈런왕 출신의 노하우를 살려 선수들을 지도해 나간다.

1995년말 김봉연은 새로 창단된 '현대 피닉스' 아마야구단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옮겨가게 되었다.

당시 해태를 떠나던 그는 "김응룡감독의 카리스마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해태를 떠나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김감독은 이렇다할 말을 하지 않았고, 해태구단은 "개인적인 문제로 해태를 떠나면서 말이 많다."라고 혹평했었다.

아무튼 김봉연은 96년초 현대를 거쳐 1년간 미국으로 지도자수업을 받기 위해 떠났다. 떠나기전 박건배구단주가 인사차들른 김봉연에게 얼마간의 여행경비를 대주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때가 96년 11월말이었다.

그때 김봉연이 해태타이거즈로 다시 복귀하게 되고, 2000시즌까지 코치로 활동하게 된다.


타협을 모르는 불같은 성격

김봉연은 강인한 인상만큼이나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선수로 있을 때 함부로 그에게 빈볼을 던졌다간 망신당하기 일수였다. 코치로 있을 때는 심판의 뺨을 때린적도 있었고, 현재까지 최다 출장정지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가 바로 김봉연이다.

김봉연의 이러한 성격이 여실히 드러났던 일화가 있다.

1991년 7월 13일. 삼성은 해태에 4대11로 대패했다.
당시 삼성의 김성근감독은 해태전 2승 9패의 치욕을 떨쳐 버리기위해 꽁수(?)를 부리기로 한다.

해태의 선발 투수로 예상된 우완 선동열에 대비한 좌타자일색의 선발 오더 한 장과 좌완 김정수에 대비한 우타자위주의 선발 오더 한 장해서 두장의 선발 오더를 작성한 것이다.

이날 주심에게 오더를 건넨 이는 삼성은 배대웅 코치였고 해태는 김봉연코치였다. 배코치는 해태 김봉연코치가 박찬황 주심에게 오더를 건네는 것을 보고 한발 늦게 다가갔다. 물론 두장의 오더를 들고 있었다.

"선발이 누구죠?" 배코치는 박주심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선동렬인데..."

배코치는 그 말을 듣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코치는 그 모습이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오더를 받아보면 알 게 될 일을 굳이 물어보는 게 이상했던 것이다.

"왜 선발투수를 알려주는 겁니까?" 김코치는 말을 내뱉기 무섭게 배코치에게 달려들었다.

김코치의 기습을 당한 배코치는 왼손에 들고 있던 또 한 장의 오더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결국 삼성의 김성근감독의 꽁수는 김봉연 코치의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들통이 났고, 이에 해태 김응룡감독은 선동렬을 내세워 꽁수에 정면으로 맞부딪혀 응징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결국 경기는 김성근 감독의 바람대로 선동렬을 6회 강판시키며 7대1로 대승했으나 그날 이후 도덕성에 금이 가 한동안 애를 먹어야 했다.


야구인에서 교육인으로

후배인 김성한이 해태 타이거즈의 새로운 사령탑으로 승격되면서 야구계를 떠났던 김봉연은 2001년 2학기부터 충북 음성에 있는 극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TV해설자로도 간간이 얼굴을 비추며, 구수한 입담을 보여주고 있다.

김봉연은 프로통산 670경기에 출전해서 0.278의 타율과 110개의 홈런, 334점의 타점을 올렸다. 선수시절 종종 헬멧이 벗겨질 정도로 큰 스윙을 했는데, 헛스윙을 하면 헬멧이 벗겨지기 일쑤였고, 그럴 때면 관중들이나 해설가, 아나운서까지 웃음을 터트렸었다.

오죽 했으면 김봉연의 별명이 한때 '탈모왕'이었을까..
아무튼 김봉연은 호쾌한 스윙을 선보였고 그의 홈런은 시원함 그 자체였다.

직선으로 쭉 뻗어나가는 라인드라이브성 홈런보다는 높게 포물선을 그리며 서서히 보는이로 하여금 그 홈런을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주면서 담장을 넘어가는 홈런이 그의 홈런이었다.

김봉연은 선수들의 황혼기라 하는 30대의 늦은 나이에 프로야구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젊은 선수들에비해 힘과 기량에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최고의 타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983년 6월 교통사고로 선수생명의 기로에 서기도 했지만, 그해 MBC와의 한국시리즈에서 콧수염을 휘날리며 19타수 9안타(0.474) 1홈런 8타점으로 MVP가 돼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썼던 김봉연은 이제 야구인에서 교육인이 되었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의 주역이자, 프로야구 초대 홈런왕, 해태타이거즈 첫 우승의 일등공신이었던 김봉연은 아마추어와 프로시대를 관통하는 홈런타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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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투수로 나선 기아 타이거즈의 로페즈가 경기중에 오른발 뒷꿈치는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고도 투혼을 발휘해 끝까지 던져 팀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기아 타이거즈는 4월 17일 광주 홈구장에서 열린 한화이글스와의 경기에서 로페즈의 부상투혼과 장단 13안타가 폭발하며 8대1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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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페즈 부상투혼, 7이닝 1실점 역투


아킬리노 로페즈는 17일 광주구장에서 열린 한화이글스와의 홈경기에 선발 출전했습니다.

1회를 무실점으로 막고 순조로운 출발을 보인 아킬리노 로페즈는 2회초 무사 1루에서 고동진의 1루 땅볼 때 베이스 커버에 들어가다가 고동진과 충돌하며 발을 밟혔습니다.

로페즈는 고통을 호소하다 활짝 웃으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고 마운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로페즈는 고동진의 스파이크 날에 오른쪽 뒷꿈치가 3㎝정도 찢어진 상태였습니다.

2회를 무실점으로 마친 로페즈는 팀 의료진에게 부상 사실을 알렸고, 기아 타이거즈 의료진은 병원에 가야한다고 말했으나 로페즈는 아직 경기 초반이라고 투혼을 보이며 테이핑으로 긴급처방만 한채 다시 경기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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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페즈는 부상직후인 3회에 연속안타롤 허용해 1점을 주긴했지만, 4회에 3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내는등 7회까지 삼진만 총 10개를 잡아내며 1실점 호투하고 마운드를 내려와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최희섭 마수걸이 홈런, 타선 대폭발

이번 시즌 팀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기아 타이거즈 타선은 로페즈의 부상투혼에 분발하며  더 활활 타올랐습니다.

기아 타이거즈 4번타자 거포 최희섭은 4회 비거리 130미터 장외홈런을 터트렸습니다.
빅초이 최희섭의 이번 시즌 첫 홈런으로 이날 경기에서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4타수 2안타 1타점 1볼넷 3득점으로 맹활약했습니다.

최희섭은 2안타를 추가하며 시즌 타율을 4할1푼2리까지 끌어올리며 타격 2위에 올랐습니다. 현재 타격 1위는 4할1푼2리의 두산의 손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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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타이거즈는 7이닝 1실점 10탈삼진으로 호투한 선발 아킬리노 로페즈의 부상투혼과 최희섭의 시즌 1호홈런을 포함 13안타를 몰아쳐 8대1로 한화이글스에게 전날 1점차 패배를 설욕하며 주말 3연전을 2승1패로 마무리했습니다.


로페즈,트래비스 기아 타이거즈 용병투수의 맹활약

기아 타이거즈 아킬리노 로페즈는 이날 승리를 포함해서 올 시즌 3차례 선발등판에서 모조리 승리를 따내며 3연승을 질주했습니다. 4월 10일 트래비스 완봉역투를 포함해 총 4승을 외국인투수들이 차지하며 이번시즌도 기아표 용병투수의 활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토종 에이스 윤석민이 무너지고 불펜이 불안한 가운데 로페즈,트래비스 용병투수의 맹활약은 기아 타이거즈 상승세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2009년 기아 타이거즈는 로페즈,구톰슨의 외국인 선발투수의 맹활약으로 10년만에 우승을 차지한바 있습니다. 로페즈는 3년연속 좋은 모습을 보이며 확실한 믿음을 주는 에이스로 거듭났고, 올해 새로 영입된 트래비스는 당시 쿠톰슨을 떠올리게하는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몇년간 투고타저 현상을 보이며 선발투수들이 좋은 활약을 펼쳐도 승리를 못딴 경우가 많았던 기아 타이거즈는 이번 시즌 오히려 타선이 폭발하고 반대로 투수가 무너지는 타고투저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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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타이거즈 타선은 올해들어 1,2번타자 이용규 김선빈의 활약과 새로 영입된 3번타자 이범호의 부활, 4번타자 최희섭과 5번타자 해결사 김상현까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완벽한 짜임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위타선에 있는 안치홍과 나지완도 상위타선 못지않은 화력을 뽐내고 있습니다.

외국인 용병투수들의 맹활약과 타선이 살아난 기아 타이거즈가 지난 시즌 부진의 수모를 딛고 올 시즌 다시 살아나서 상승세를 타게될지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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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영입된 좌완 용병투수 트레비스 블랙클리가 기아 타이거즈의 연패를 끊었습니다.

기아 타이거즈가 외국인 용병투수 트레비스 블랙클리의 시즌 1호 완봉 역투에 힘입어 두산 베어스를 꺾고 잠실 징크스을 떨쳤습니다.

기아 타이거즈는 4월 10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두산전서 트레비스의 9이닝 무실점 완봉투와 '종범신' 이종범의 선제 결승타를 앞세워 8-0으로 승리했습니다.

기아 타이거즈는 이날 승리로 시즌 전적 3승 4패를 기록하며 최근 3연패 및 원정 3연패와 지난해 6월 25일부터 이어졌던 잠실구장 13연패의 잠실 징크스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반면 두산 베어스은 트레비스 특유의 투구폼과 직구,커브,슬라이더의 절묘한 볼배합에 적응하지 못하며 영봉패의 굴욕을 당했습니다.

두산 베어스는 3연승 행진을 마갑하며 시즌 전적은 4승 3패.


두산과 기아의 0대0 팽팽한 균형은 3회초에 깨졌습니다.

2회말 1사 2,3루의 위기상황을 트레비스의 역투로 무실점으로 넘긴 기아 타이거즈는 위기뒤에 찬스를 잡고 반격을 시작합니다.

올 시즌 타격 1위(팀타율 3할1푼5리)에 빛나는 기아 타이거즈의 방망이는 이날도 매서웠습니다.
 
3회 KIA는 선두 타자 안치홍이 좌중간 2루타로 공격의 물꼬를 틉니다.

보내기번트를 노리던 다음타자 김상훈은 페이크번트 앤드 슬래시(번트 자세 뒤 강공 전환)로 무사 1,3루의 찬스를 이어갑니다.

지난해까지 김선우 상대로 4할2푼3리(26타수 11안타) 7타점을 올리며 강세를 보인 이종범이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이종범은 김선우의 3구를 가볍게 잡아당겨 안치홍을 불러들이는 1타점 좌전 안타로 선취점을 올렸습니다.

기아 타이거즈는 선취점을 뽑은 기세를 이어가며 김선우를 더욱 거세게 몰아부칩니다.

이용규의 보내기 번트로 만들어진 1사 2,3루 찬스에서 최고의 타격감을 자랑하는 김선빈이 2타점 짜리 중전 적시타를 터뜨렸습니다.

이어 이범호, 최희섭이 연속 안타로 출루했고 2사 만루 상황에서는 김상현의 3루 땅볼을 1루수 윤석민이 놓치며 2점을 더 달아납니다.

이후 KIA는 7회 2점, 9회 1점을 추가하며 두산 베어스에 완승을 거듭니다.

기아 타이거즈 선발 트레비스는 9이닝 동안 5피안타에 탈삼진을 9개나 잡는 무실점 완봉 역투로 8개구단중 시즌 첫 완봉을 달성했습니다.

특히 사사구를 1개만 내주며 완봉을 펼쳐서 올 시즌도 기아표 용병투수의 성공시대가 거듭될지 주목됩니다.

야구팬들 사이에 '믿고쓰는 기아표'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지난 10년간 기아 타이거즈는 수준급 용병투수를 잘 골랐습니다.

기아 타이거즈를 거쳐간 특급용병투수만 해도 리오스,레스,키퍼,존슨,그레이싱어,로페즈,구톰슨 등 두손으로 세기도 벅찹니다.


팀을 우승으로 이끈 기아표 용병투수

2009년에는 로페즈와 쿠톰슨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원투펀치의 기아표 용병투수는 합작 27승을 거두며 기아 타이거즈를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당시 기아타이거즈는 로페즈와 쿠톰슨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원투펀치에 윤석민,양현종,서재응으로 이어지는 토종선발진도 특급활약을 펼쳐 막강한 5선발 야구의 위용을 드러낸바 있습니다.


특히 로페즈는 한국시리즈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펼쳐 10년만에 기아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1등 공신이 되었습니다.


두산이 좋아하는 기아표 용병투수 

그동안 두산 베어스는 기아표 용병투수들로 재미를 많이 봤습니다.

바로 레스, 키퍼, 리오스가 기아에서 두산으로 넘어간 대표적인 기아표 용병투수입니다.

그만큼 기아는 두산의 외국인선수 젖줄 구실을 도맡아 했습니다.

시작은 좌완용병투수 게리 레스였습니다.

2001년 KIA에서 7승9패(평균자책점 4.34)를 기록한 게리 레스가 재계약에 실패하자, 두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냉큼 영입했습니다.

두산베어스 시절 게리 레스

두산에 간 레스는 단번에 에이스로 떠올랐습니다.

이적 첫해인 2002년 16승8패(3.87)를 거뒀고, 2004년에는 17승8패(2.60)으로 더 좋은 성적을 올렸습니다.

두산에서 성공하며 일본에 진출한 레스는 대만을 거쳐 다시 두산으로 돌아옵니다.

2008년에도 6경기에서 3승2패(2.84)를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부인의 병간호를 이후로 미국으로 건너간후 은퇴합니다.

게리 레스로 재미를 본 두산은 2003년도에 또다시 기아표 용병 마크 키퍼를 영입합니다.

마크 키퍼는 기아 타이거즈에서 2002년 19승 9패(3.34)의 호성적으로 외국인 투수로는 처음으로 다승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2003년 시즌중 기아는 마크 키퍼를 두산에 주고 최원호를 받는 트레이드를 합니다.

잠실구장으로 간 마크 키퍼는 펄펄 날았습니다.

마크 키퍼는 2004년까지 2시즌 동안 270이닝을 던지며 활약했습니다.

기아 타이거즈 시절 다니엘 리오스

레스와 키퍼로 재미를 본 두산은 또다시 기아와 트레이드를 단행합니다.

2005년 시즌 도중 두산은 좌완 유망주 전병두를 주고 몇년간 기아의 에이스 역활을 한 다니엘 리오스를 데려옵니다.

기아 타이거즈는 제구력에 문제를 보이는 리오스를 과감하게 버립니다.

두산은 장래가 총망되는 좌완 유망주 전병두를 주는 모험을 했지만, 기아표 용병투수의 위력을 알기에 트레이드를 단행했습니다.

리오스 역시 '믿고쓰는 기아표' 용병투수답게 두산에서 초특급 활약을 펼칩니다.

리오스는 2007년 22승을 올리며 외국인 투수로서는 처음으로 MVP까지 차지했습니다.


일본도 탐내는 기아표 용병투수

기아표 용병투수의 활약상은 일본프로야구에까지 전해집니다.

기아 타이거즈 시절 세스 그레이싱어

2006년 14승12패(3.02)로 KIA의 에이스 구실을 하며 '회색가수'라는 별명을 얻은 세스 그레이싱어는 시즌이 끝난후 일본프로야구팀 야쿠르트로 이적합니다.

일본 입단 첫해서 16승으로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하고, 2008년에 자유 계약 선수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후 전년도에 이어 시즌 17승을 기록하여 2년 연속 다승왕에 오르며 일본무대에서도 '기아표 용병투수'는 최고의 투수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밖에 게리 레스와 다니엘 리오스도 두산을 거쳐 일본무대에서 활약을 합니다.


그밖에 기아표 용병투수 

기아표 용병투수라고 무조건 성공만 한것은 아닙니다. 실패하고 돌아간 선수들도 있습니다.

기아 타이거즈 시절 호세 리마

호세 리마는 기아 타이거즈가 공들여 영입한 특급 용병투수였습니다.

한때 메이져리그에서 20승투수를 했을 정도로 실력도 뛰어나고 성격도 빅리그에서 유별라게 튀어 리마타임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괴짜였습니다.

그러나 호세 리마는 기대와는 달리130km/h 대에 머무는 구속과 제구가 안되는 변화구는 난타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워낙에 재미있는 선수라서 경기장에서 자신을 불러주면 좋아하고 수많은 야구 짤방의 대표격이어서 야구팬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부진한 성적때문에 퇴출설이 나돌다 결국 퇴출되었습니다.

양현종과 무척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제이슨 스코비는 2007년 시즌중반에 영입되어 무난한 활약을 했습니다.

그러나 2008년 메이저리그에서 서재응이 돌아오자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방출됩니다.

애서튼은 2007년 영입되어 그레이싱어의 빈자리를 메워줄것으로 기대했지만 팔꿈치 부상이 재발하며 퇴출되었습니다.


새로운 기아표 용병투수 트레비스 블랙클리

4월 10일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완봉 역투를 펼친 트레비스 블랙클리는 올 시즌 영입된 새로운 기아표 용병투수입니다.

트레비스 블랙클리는 시속 150km의 강속구와 다양한 변화구가 인상적인 투수입니다.

호주 멜버른 출신이고 인성도 좋다고 합니다.

트레비스 블랙클리는 죄완 정통수 투수로 신장 193cm, 110kg의 거구로 2000년 미국프로야구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고서 지난 시즌까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산하 새크라멘토 리버캐츠에서 뛴 프로경력 10년 차 투수입니다.


메이저리그는 2004년 시애틀과 2007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뛸 때 각각 한 번씩 경험했습니다.

빅리그 경력이 화려한건 아닙니다. 2시즌 동안 8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1승3패 평균자책 9.35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마이너리그 성적은 수준급이었습니다.

223경기 가운데 173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66승58패 평균자책 4.05를 기록했습니다.

특히 마이너리그 통산 9이닝당 삼진과 볼넷이 각각 7.74개와 3.58개로 괜찮은 탈삼진 능력과 제구를 갖춘 투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트레비스 블랙클리가 기아 타이거즈에 입단하자 모구단 스카우트는 강약조절이 우수하고 변화구 구사능력이 수준급이라고 평가하며 우리팀에 영입하고 싶었던 선수라 말하며 아쉬워했습니다.

외국인 선수를 잘 뽑기로 소문난 KIA 스카우트팀이 이번에도 월척을 건졌다는것이 스카우터들의 중평입니다.


반전의 기회를 잡은 기아 타이거즈

올 시즌 초반부터 역전패를 몇번 당하며 위기감이 돌던 기아 타이거즈는 4월 10일 두산에 8대0 완봉 대승을 거두며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켰습니다.

2009년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을 이끈 로페즈가 건제한 가운데, 새로운 기아표 용병투수 트레비스 블랙클리는 기아의 막강한 선발 원투펀치를 이룰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기아 타이거즈는 예상 외로 타선이 화끈하게 터지고 있습니다.

팀 타율은 3할1푼5리로 1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2위 SK 와이번스와 2푼이 넘게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득점도 8개 팀 중 가장 많은 평균 7.4점을 뽑아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아 타이거즈는 무너진 투수진만 되살아 난다면 금방 상위권으로 뛰어오를 저력이 있습니다.
6경기중 무려 5경기에서 블론 세이브가 나올 정도로 무너진 불펜진이 일어서느냐가 관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트레비스의 완봉 역투는 긴 가뭄 끝 단비와 같았습니다.

트레비스 블랙클리는 팀의 연패를 끊어서 기쁘다며 소감을 전했습니다.

올시즌 영입된 기아표 용병투수 트레비스 블랙클리의 활약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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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오후 목동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가 있었습니다.

이날 경기에서 넥센 히어로즈의 마스코트 턱돌이가 시구를 마친 걸그룹 LPG의 멤버 세미를 번쩍 들어안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턱돌이의 미녀사냥이 또 시작된 것일까요.

턱돌이 세미습격사건

시구를 마친 세미를 턱돌이가 포옹하는 듯 하더니 번쩍 들어안습니다.

턱돌이의 못말리는 미녀습격사건이 재발했습니다.
 

나머지 LPG 멤버들이 배트를 휘두르며 턱돌이를 저지해보지만, 미녀를 껴안은 야수 턱돌이의 줄행랑을 막기엔 역부족입니다.

부..부럽습니다. ㅠ.ㅠ

그런데 지난해 턱돌이에겐 가슴아픈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올스타전때 벌어진 해프닝인 '강민경 습격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턱돌이는 야구팬들의 뭇매를 맞으며 한참동안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턱돌이는 변태로 오인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턱돌이가 모든 여자 연예인을 좋아하는것은 아닙니다.

턱돌이도 의외로 여자보는 눈이 높습니다.

장미인애가 시구자로 나서자 턱돌이 종이위에 쓰여진 글씨를 보입니다.

턱돌이가 여자 연예인과 스킨쉽을 마다하다니 왠일일까요.


"난 나를 부활시킨 얼짱, 섹쉬 귀염둥이"


"이신애 너뿐이야"

턱돌이가 이신애를 향한 일편단심을 드러냅니다.

턱돌이에게 굴욕을 당한 장미인애 얼굴을 보니 웃는게 웃는게 아닙니다.


턱돌이가 장미인애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재빨리 도망칩니다.

턱돌이 이제 큰일 났습니다.


굴욕을 당한 장미인애 끝내 턱돌이를 향해 사구를 던지며 분노를 폭발합니다.

'이신애 너뿐이야'를 끝까지 들고 도망가는 턱돌이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냅니다.


턱돌이의 설레발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수비교체를 하러나온 김시진감독의 행동을 턱돌이도 마치 감독이라도 된듯 따라하면서 교체선수를 불러들입니다.

설레발 턱돌이는 가끔 넥센 히어로즈 선수들에게 레슨도 합니다.


롯데에서 이적한 김민성에게 타격자세를 가르치는 턱돌이의 설레발.


턱돌이에게 레슨 굴욕을 당한 김민성이 턱돌이의 약점인 턱을 잡습니다.

여기저기 설레발치더니 당해도 쌉니다.

그래도 여기에 굴복할 턱돌이가 아닙니다.

비가오고 경기가 우천취소되면 야구경기장에 찾은 팬들은 허탈해합니다.

이때 관중들의 시선을 끌고 경기취소의 아쉬움을 털어내는 세러모니가 있습니다.

바로 비속의 슬라이딩(우천취소 세러머니)입니다.

한화 이글스는 치어리더까지 동원해 비속 슬라이딩 세러머니를 해서 팬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천취소 세러머니는 보통 어린 선수들이나 언론의 조명을 자주 못하는 선수가 나오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대호, 김현수 등의 스타급선수들도 팬들의 요청이나 자청해서 시원한 홈슬라이딩으로 팬들을 즐겁게 합니다.

설레발 턱돌이도 여기에 빠질리가 없죠.


멋진 슬라이딩으로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의 환호를 받습니다.

턱돌이의 우천취소 세러모니를 보면 경기취소의 아쉬움도 달랠수 있습니다.

이렇게되자 넥센 히어로즈 마스코트 턱돌이의 인기는 8개구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기아 타이거즈에도 턱돌이가 등장했습니다.


롯데 자이언츠에도 턱돌이가 함께 화이팅을 외칩니다.


턱돌이가 혼자서 8개구단의 인기를 독차지하자 다른팀 마스코트들이 화났습니다.

턱돌이만 혼자 왕따를 시켜 버립니다.

턱돌이 너무 인기가 많아도 문제입니다.

턱돌이의 인기가 많다보니 턱돌이 닮은꼴도 화제입니다.

얼마전 무한도전 타인의삶 특집에서 노홍철이 턱돌이 닮은꼴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무한도전 녹화 준비를 하던 유재석이 이숭용의 소속팀인 넥센 히어로즈의 마스코트 턱돌이 인형을 보고 노홍철이라 외치자 이숭용은 진짜 닮았다며 놀라워 했습니다.

노홍철 도플갱어 넥센 히어로즈 마스코트 턱돌이

정말 노홍철과 턱돌이가 닮긴 닮았습니다.

다른 무한도전 멤버들도 노홍철과 턱돌이가 너무 닮았다면서 놀라며 웃습니다.

그러나 턱돌이를 노홍철보다 더 닮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프로야구 3대 턱들 조성환 카도쿠라 홍성흔입니다.

2010 올스타전 경기전 프로야구 3대 턱들(조성환 카도쿠라 홍성흔)의 포즈

프로야구 3대 턱들 정말 턱돌이와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도 진정한 턱돌이의 닮은꼴 종결자는 조성환입니다.

턱돌이를 이보다 더 닮을수는 없습니다.

조성환은 웃으며 자신은 턱돌이를 닮지 않다고 부인해보기도 했지만, 야구팬들의 못말리는 턱돌이 사랑은 그치질 않습니다.

조성환도 이제는 이판사판입니다.


조성환이 턱돌이모습을 하고 인터뷰를 해 시청자들의 웃음을 유발했습니다.

턱돌이와 조성환은 이제 같이 춤도 추는 사이입니다.


2010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턱돌이와 조성환이 흥겨운 댄스를 보였습니다.

이렇게 익살스럽고 재미난 턱돌이는 외롭습니다.

가족이 없이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넥센 히어로즈의 마스코트 턱돌이 길윤호 씨의 최종목표는 턱돌이 가족을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턱순이를 시작으로 아들 딸 캐릭터를 계속 만들어 가족을 이루고 싶어합니다.

올 시즌에 턱돌이의 간절한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야구팬들의 폭소를 유발하는 턱돌이의 유쾌한 설레발을 앞으로도 계속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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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현은 올시즌 첫선발 등판한 4월 5일 잠실 LG전에서 지난해와는 다른 볼배합을 보였습니다.

김광현이 기존의 주무기인 직구와 슬라이더 외에 커브와 스플리터. 투심까지 던진 겁니다.

이중에서 김광현은 103개 중 13개를 커브로 던졌습니다.

김광현이 프로무대 데뷔 이후 보기 힘들었던 커브여서 야구팬들에게 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교무대를 평정한 김광현의 폭포수 커브

사실 김광현은 안산공고 시절만해도 주무기가 커브로 불릴 정도로 커브를 상당히 잘 던졌습니다.

188cm의 큰 키에서 내리꽂는 낙차 큰 커브는 많은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했었죠.

다른 투수들보다 릴리스포인트가 높다보니 커브의 각도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컸습니다.

안산공고 시절 김광현

김광현은 안산공고 시절 에이스 겸 4번 타자로 팀을 혼자 이끌다시피 해서 당시 안산공고는 '광현공고'라는 웃지못할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당시 김광현은 직구와 커브만으로도 고교무대를 손쉽게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슬라이더와 공존이 쉽지 않은 커브

하지만 프로 입단후 김광현은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사용하면서 커브는 잘 쓰지 않게됐습니다.

김광현도 예전의 장기인 커브와 현재 주무기인 슬라이더를 둘 다 던지면 좋다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투구 매커니즘상 슬라이더와 커브를 함께 잘 던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슬라이더와 커브는 던지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 공존하기 쉽지 않은 구종이기 때문입니다.

또 공을 옆으로 쥐고 던지는 커브는 슬라이더에 비해 직구와 확연히 구별돼 타자들에게 노출될 위험이 높습니다.

김광현이 그동안 커브를 버리고 슬라이더를 더 선호해온 이유입니다.

커브볼을 잘 구사하는 대표적인 투수는 메이저리그의 배리 지토가 있으며, 국내 프로야구에서는 롯데 자이언츠의 최동원, 삼성 라이온즈의 김상엽, SK 어린왕자 김원형이 커브를 잘 구사했습니다.

특히 최동원의 커브는 폭포수 커브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타자들이 가장 겁내는 구질 커브


커브(Curveball)는 타자입장에서 보면 직구와 똑같이 보이다가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실밥이 선명하게 보이며 뚝 떨어집니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뛰어난 커브볼을 던질 줄 알면 그보다 큰 무기는 없습니다.

그것도 빠른 커브볼, 중간 빠르기의 커브볼, 느린 커브볼을 구사하면 아무도 제대로 쳐낼 수 없게 됩니다.

커브는 다른 구질과는 다른 팔 동작이 필요하고 완전히 익히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사용 횟수가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대신 슬라이더가 대중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점이 현대 야구에서 커브의 이점을 더 크게 만들고 있습니다.

젊은 타자들일수록 커브볼에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커브볼 공잡는법

커브는 타자에게 쭉 들어오다가 마치 폭포물이 떨어지듯이 그냥 떨어지는 공입니다.

변화가 심할수록 타자는 치기 어렵기 때문에 요즘 투수들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바깥쪽으로 휘게 던집니다.

커브는 홈 플레이트 150cm 앞에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커브를 던질 때 팔의 회전을 자전거 바퀴를 연상하면 됩니다.

팔꿈치가 바퀴의 축이 되고 팔꿈치 아랫부분은 바퀴의 살이 되는 것입니다.

중심 역활을 하는 팔꿈치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공을 쥔 손을 축을 따라 회전시킵니다.

팔의 회전이 다른 것처럼 손목에서 공을 놓은 것도 다릅니다.

손목은 손목 아랫부분에 비해 5도 에서 10도 정도 치켜올립니다.

또한 다른 구질이 대부분 손끝으로부터 빠져 나가는데 비해 커브는 엄지와 검지 사이로 빠져 나갑니다.

동작이 이처럼 다르기 때문에 타자들은 커브 볼을 던지는 순간까지 다른 공을 던질 때와 차이가 없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커브 볼은 보통 직구보다 속도가 시속 16km 정도 느립니다.


다양한 구종을 구사하는 투수들

김광현은 고교시절 주무기인 커브까지 선보이며, 기존의 주무기인 직구(포심패스트볼)와 슬라이더 외에 스플리터. 투심까지 다양한 구질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프로야구에서 다양한 구종을 구사하는 대표적인 투수는 KIA 에이스 윤석민입니다.

윤석민은 올시즌 들어 새 무기로 변형 포크볼을 장착해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는 슬라이더, 투심 포심 패스트볼, 써클체인지업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합니다.

실전에서 활용 빈도가 낮긴 하지만 너클 커브와 팜볼도 던질 수 있습니다.

자신있게 던질 수 있는 결정구가 많은 만큼 타자들은 윤석민의 볼을 노려서 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롯데 송승준과 손민한도 많은 구종을 갖고 있는 투수들입니다.

송승준은 직구, 슬라이더, 커브를 기본으로 체인지업, SF볼, 서클체인지업, 투심패스트볼 등을 던집니다.

특히 위기상황에서 변화구를 구사해 땅볼을 유도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손민한은 포심 투심 패스트볼과 커브, 체인지업, 포크볼, 슬라이더 등 다양한 구종으로 맞춰 잡는 피칭을 합니다. 대신 구속은 빠르지 않습니다.

이처럼 투수들의 구종 다양화는 프로무대에서의 생존 전략입니다.

투수들은 새로운 구종을 장착해 타자와의 수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강속구 투수들은 나이가 들면서 구속이 저하되고 파워를 잃게 됩니다.

이같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양한 변화구를 가미해서 기교파 투수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현역 시절 다양한 구종을 구사해 '팔색조'라는 별명은 얻은 조계현 두산 투수코치는 투수들의 구종 다양화는 필수라고 강조합니다.


올시즌 김광현 주무기로 탄생한 커브


김광현은 첫선발 등판한 4월 5일 잠실 LG전에서 100km 초반대의 낙차큰 커브를 선보이면서 고교시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김광현은 확실히 지난해와는 다른 볼배합을 선보였습니다.

김광현은 함께 구사하기 힘든 슬라이더와 커브를 섞어 던지며 두 마리 토끼를 잡았습니다.

경기 초반에는 슬라이더 비중이 높았지만 타자들이 슬라이더에 대응하기 시작하자, 커브의 개수가 늘어났습니다.

커브를 던지다가 한 차례 안타를 맞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LG 타자들은 슬라이더 타이밍에 배트를 내밀었다가 헛스윙을 연발하거나 범타에 그쳤습니다.

LG 4번 타자 박용택은 김광현의 100km 초반대 커브에 헛스윙을 한 뒤 허탈한 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날과 같은 모습이 이어질 경우 올시즌 김광현에게 큰 힘이 될 전망입니다.

현재 김광현이 던지는 구종 중 130km 미만은 커브가 유일합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커브가 들어오면 상대 타자들은 허를 찔릴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커브 뒤 들어오는 빠른 직구나 슬라이더는 공의 위력이 배가됩니다.

이날 김광현의 위력적인 커브를 보니, WBC때 상대타자들이 슬라이더에 중점을 맞추고 있을때 커브로 승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당시 김광현은 슬라이더를 고집하다 일본타자의 노림수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바 있습니다.


김광현이 올시즌 고교시절의 주무기였던 커브를 자주 사용하게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무서운 김광현에 구질이 하나더 추가됐다는 것만으로도 타자들은 긴장해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이날 김광현은 개인통산 100번째 등판 경기에서 승리를 챙기지는 못했지만,  타자와의 심리싸움에서 쓸 수 있는 카드가 한장더 늘어나 올시즌도 변함없이 무시무시한 투수의 자리를 이어갈 전망입니다.

해마다 진화하고 있는 김광현의 올시즌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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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3월 27일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프로야구 개막 첫경기이후 어느새 프로야구가 30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난 30여년간 우승의 환호와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선수가 있는반면, 패배의 좌절과 불운했던 선수들도 많았습니다.

역대 30년간 최고로 불운했던 프로야구선수 3명을 꼽아보았습니다.


1. 임수혁

롯데 자이언츠팬들에게 가장 불운했던 선수가 누구냐 물으면 생각도 안하고 대답할 것입니다. 임수혁..

서울고를 나와 고려대에서 상무를 거쳐 1994년 2차지명 1순위로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한 임수혁 선수는 국가대표출신으로 공격이 뛰어났으며, 포수로는 드물게 도루 능력까지 겸비했습니다.

특히 중요한 순간에 한방씩 쳐내는 그의 클러치 능력에 많은 부산팬은 열광했었죠.


그런데 임수혁은 2000년 4월 18일 LG와 롯데의 경기중에 갑자기 쓰러져서 호흡곤란을 일으킨 후 의식을 잃었습니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그 당시 조금이라도 신속히 대처했었더라면, 인공호흡을 하던 산소 마스크라도 갖다대었다면 지금처럼 식물인간이 되는 상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늦은 응급처치로인해 임수혁선수는 심장 부정맥으로 인한 발작으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투병 9년여만인 2010년 2월 7일에 한림대학교 강동성심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임수혁은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식물인간이 되던 경기날에도 아버지에게 선물을 준비했다고하는 극진한 효자여서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은 임수혁의 등번호인 20번을 헬멧과 모자에 새기고 출전하기도 했습니다.



2. 이숭용 선수

얼마전 무한도전 타인의삶 특집에서도 출연했던 이숭용 선수도 대표적인 불운한 선수입니다.

태평양 돌핀스의 이숭용 유니폼

이숭용은 1994년 인천의 연고의 태평양 돌핀즈에 입단합니다.

그런데, 이숭용선수의 야구인생은 현대가 태평양을 거금에 인수하면서 180도 바뀌게됩니다.

현대는 당시 막강한 자금력으로 박경완, 박재홍 같은 최고의 선수들을 영입해 최강의 팀으로 군림합니다. 창단하자마자 준우승을 하더니 다음해에 죽쑤고. 98년도에는 창단 3년만에 첫 우승을 일구어 냅니다.

이떄만해도 이숭용선수는 현대 유니콘즈의 프랜차이즈 스타로서 탄탄대로의 인생을 달립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숭용선수의 인생은 갑자기 꼬이기 시작합니다.

현대 유니콘즈에 무한한 사랑을 보내줬던 인천의 팬들을 배신하고, 현대는 서울로 가겠다고 깜짝선언을 하고 막대한 돈을 내면서 서울에 입성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서울로 가려고 하니 회사가 갑자기 부도가 난겁니다. 회사가 부도가 나자 서울입성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되고, 회사 사정이 좋아질때까지 현대 유니콘스는 수원에 자리잡게 됩니다.

여기서 배신당한 인천 팬들은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게되죠.

현대 유니콘스 시절의 이숭용

어쨌든 현대는 수원으로 가자마자 또다시 덜컥 우승을 해버립니다.

우승을 계기로 수원에서도 조금 관심을 갖나 했는데, 언젠간 떠나갈 팀이었던 현대를 반기고 관심갖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03,04년 2년연속 우승을 일구어내기도 했고 성적은 좋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유니콘스는 야구팬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설상가상 수원구장의 시설은 정말 최악이여서 관중이 들어찰리가 없었습니다.

현대 유니콘스의 홈경기때마다 경기장은 텅텅 비기 마련이였고, 심지어 원정팀보다 관중이 적을 정도였습니다.

팀을 창단후부터 한번도 떠나지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킨 선수가 바로 이숭용선수는 데뷔후부터 지금까지 16년을 태평양-현대-히로즈로 이어지는 한팀에서만 뛰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팬들한테는 주목 받지 못하는 이숭용선수.

넥센 히어로즈의 이숭용

이숭용선수 어느덧 나이가 마흔이 넘었습니다.

인천의 스타로 크면서 최고의 야구인생을 보낼수 잇었던 이숭용 선수..

16년 동안 한팀에서 뛰셨음에도 대접받지 못하고 팬들에게 관심조차 받지 못한채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평한마디 없이 팀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말을 했고, 작년 39살이라는 적지않은 나이에 젊은 선수들에 못지않은 활약을 펼쳐 주전을 꾀차기도 했습니다.

팬들에게 관심조차 받지 못한채,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불평한마디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영원한 캡틴 이숭용선수.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고 은퇴하시는게 꿈이라고 하시는데 기적같은일이 일어나서 이숭용 선수가 한국시리즈무대를 밟길 바랍니다.


3. 이선희 선수

만화나 드라마속에서나 있을법한 각본없는 드라마를 연출한 장본인이죠.

바로 프로야구 첫시즌 개막식을 만루 홈런으로 시작해서, 한국시리즈 마지막경기를 만루홈런으로 막을 내리게 했습니다.

바로 이 각본없는 드라마의 주인공은 이종도 타자, 김유동 타자, 이선희투수입니다.

삼성 라이온즈의 이선희투수는 프로야구 개막식에서 팽팽하던 연장 10회말 7대7 동점상황에서 MBC 청룡의 이종도타자에게 역전 만루홈런을 맞게 됩니다.

82년 10월 12일 한국시리즈 최종 6차전에서 이선희는 OB베어즈의 김유동에게 만루홈런을 내줍니다.

이 만루홈런으로 OB는 82년 프로야구 첫 해의 챔피언으로 우뚝 서게 됩니다.

개막전에 이어 코리언시리즈 6차전에서 만루 홈런을 허용한 이선희투수는 비통에 빠진 장면은 팬들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만루홈런을 치고 우승을 차지한 이종도의 환희에 찬 열광과는 대조적으로 마운드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이선희의 망연자실한 모습은 시청자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습니다.

개막전에서 만루 홈런을 허용하고 '다시는 세 여자(아내와 두딸)를 울리지 않겠다.'던 이선희는 코리언시리즈에서 또다시 세 여자를 울렸습니다.
 
이선희는 그후 줄곧 홈런의 망령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개막전 만루홈런의 주인공이였던 이종도 고려대 전감독과 이선희 삼성 스카우트 코치

당시 재밌는 숨겨진 에피소드가 있는데 프로야구 첫 개막식은 엄청난 공포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첫시구자로 시구하러 왔기 때문이였죠.

군사독재시절이라 선수들에게 화장실도 못가게 하고, 경호원들이 양복에 노란 타이를 매고 귀에는 리시버 같은 걸 꽂고 있었습니다.

데모도 많았던 시절이여서 경비원들의 경비가 아주 삼엄했죠.

그런 분위기속에서 삼성 라이온즈는 2회초에 MBC 청룡을 상대로 5대 0으로 크게 앞서나가게 됩니다. 경기 분위기는 완전히 삼성쪽이였죠.

그런데 고위층에서 지시가 온겁니다. 점수 그만 내라고..

프로야구가 처음으로 시작하자마자 일방적인 게임이 나오면 흥미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슬슬하라고 지시를 내린겁니다.

그러다보니 삼성쪽에서는 홈으로 들어올 주자도 스톱시키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삼성 라이온즈는 그렇게해도 결국엔 이길 줄 알았던겁니다.

그런 식으로 하다보니까 어느새 OB 베어즈의 백인천, 유승안의 홈런으로 동점이 되었죠.

동점인 7회에 바로 이선희투수가 등판을 한겁니다.

아무튼 군사독재시절의 웃지못할 숨겨진 비화입니다.

이외에도 그라운드에서 못다핀 꽃 해태 타이거즈의 김상진투수도 있고, 스카우트 파동의 최대 희생자 강혁도 뽑을 수 있고, 국가대표 에이스로 일본 최고의팀 요미우리로 진출해 전반기에만 7승을 거두고 다승 1위로 올스타전에 진출했는데 올스타전에 부상당하고 선수생활을 마치게 된 조성민 선수도 불운했던 대표적인 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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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업(Changeup)은 야구에서 투구의 구질 중 하나이다.

인간이 던질 수 있는 스피드엔 한계가 있다.
따라서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타자는 직구라고 판단하고 스윙을 하지만, 체인지업은 직구보다 속도가 대개 12∼16km 정도 느리기 때문에 타이밍을 맞추기 어렵고, 배트에 맞는다고 해도 좋은 타구가 나올 수 없다.

체인지업은 직구와 똑같은 동작으로 던지기 때문에 무슨 공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것이 체인지업의 가장 큰 매력이고, 프로야구에서 가장 인기있는 구질중 하나이다.

미국에서도 마이너리거를 메이저리그에 올릴 때는 체인지업을 익혀 보내는게 정석일 정도다.


체인지업 특징

속구를 던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시속 12~20km 정도 공이 느리게 날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즉, 투구 동작과 투구 시 팔의 속도는 속구와 같지만 타자에게 날아오는 공은 훨씬 느리다.

이와 같은 원리로 인해 좋은 속구를 가진 투수들이 체인지업을 잘 던지면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타자는 타이밍을 맞추고, 투수는 그 타이밍을 뺏는 현대 야구에서 체인지업은 그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구질이다.

만약 빠른 속구로 스트라이크를 만들고 체인지업을 사용한다면 대부분의 타자들은 당황하고 헛스윙을 하고 만다. 커브볼 등은 던지는 순간 팔과 손목 동작의 위치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체인지업은 팔과 손목 동작의 위치로도 알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인지업은 빠른 구속을 가지고 있는 투수의 경우 가장 효과적으로 삼진을 빼앗아낼 수 있는 구질이 되지만, 공이 한가운데로 몰릴 경우 밋밋한 느낌을 주는 배팅볼과 비슷하게 되어 장타를 맞을 위험성이 가장 크기도 한다.

체인지업은 실밥을 잡아채는 속구와는 달리 손바닥으로 회전을 준다. 순간적으로 회전이 많이 걸린 것 처럼 보이지만 던지는 순간과 단 몇초간만 속구처럼 보이며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 효과로 타자의 타이밍은 공을 쳐내기 위해 앞으로 쏠리게 되며 타이밍이 흐트러진다.

체인지업만 제대로 구사할 수 있다면 최고의 투수로 탄생할 수 있다.
제일 어렵고 어려운 구질이 체인지업이기 때문이다.


체인지업 종류

체인지업은 종류가 워낙 많을 뿐 아니라 투수들이 나름대로 개발한 독특한 것들도 있다.
체인지업은 보통 서클 체인지업, 쓰리-핑거 체인지업, 손끝 체인지업 그리고 팜볼로 나누어진다.


체인지업 던지는법

일단 체인지업은 자신의 직구구속과 10킬로 이상 차이가 나야된다.

반드시 10킬로 이상이어야하는 이유는 10킬로이내의 체인지업은 대부분 슬라이더 수준의 스피
드이므로 타자의 발란스가 무너졌다 하더라도 중심이동이 앞으로 쏠린상태에서 배트 중심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투구폼 역시 직구를 던지는 폼으로 던져야만한다. 투구동작아 부자연스러울시
타자에게 준비하고 대응할 시간을 주기때문에 직구폼과 일정해야 한다.

체인지업을 잘던지기 위해서는 일단 제구력이 뒷받침되야한다.
제구력이 없는 투수는 160키로를 던진다 하더라도 외야수로써의 자질밖에는 없다.

체인지업을 평상시에 연습하는 방법은
케치볼을 할때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체인지업을 던지는것이 중요하다. 체인지업은 커브나 슬라이더 등 다른 변화구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몸의 위치와 팔 동작, 회전 속도 등이 모두 직구를 던질 때와 똑같다.

일단 제일 중요한건 부자연스러운 그립을 극복하는것이 가장 중요하다.
체인지업의 속도를 낮추기위해 공을 약간 느슨하게 쥐기 때문이다.

체인지업을 잡는 방법은 처음에는 이상하고 낯설게 느껴진다.
마치 공을 떨어뜨릴 것 같고 제대로 던져도 엉뚱한 곳으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공을 느슨하게 잡기 때문에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지 않는다.

체인지업이 직구를 던질 때와 다른 점은, 공을 놓고 난뒤 팔의 회전 스피드가 감속하는데, 그 시간이 직구보다 약간 오래 걸린다는 것과 공을 놓기 전까지의 팔의 회전 스피드가 직구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분명 낮설고 불편하게 느껴질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하루종일 체인지업 그립을 잡고 직구처럼 던지는것이다.

배팅볼을 던질때도 체인지업을 던져주는것이 좋다.

팔의 긴장도를 줄여 주기 위해서는 체인지업도 직구와 마찬가지로 공을 던지고 난 뒤 완전하고 충분한 팔로드로를 해야 한다.


박찬호의 주무기 체인지업

메이저리그 아시아출신중 최다승 투수 기록을 가지고 있는
오릭스 박찬호의 일본 야구 정벌의 화두는 체인지업이다.

박찬호는 연습캠프에서 이승엽, T-오카다 등 강타자들을 상대로 연습 피칭을 하면서 체인지업의 위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미리 구질을 알려주고 던졌는데도 오카다는 박찬호의 체인지업에 헛스윙을 했고, 이승엽은 "이런 체인지업은 일본에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박찬호가 미국 진출 후에 가장 오래 공을 들인 구질이 체인지업이었고, 가장 배우기 어려워했던 구질도 체인지업이었다. LA 다저스 시절 구단에서는 슬라이더를 금지시키고 대신 커브와 체인지업을 익히게 했다.

커브는 예전에도 던졌지만 체인지업은 처음 접한 구질이었다.
처음에는 팜볼과 유사하게 손가락 전체로 공을 감아쥐었다가 곧 엄지와 검지를 말아잡는 서클체인지업으로 그립을 바꾸었다.

그러나 좀처럼 익숙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다저스 시절 어느 정도 흉내는 냈지만 위력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적은 없었다. 그러다보니 체인지업 구사율이 10%를 넘긴 적이 별로 없었다. 2008년에는 4.6%로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9년 필라델피아로 이적하면서 박찬호는 체인지업에 새롭게 눈을 떴다.
체인지업의 달인인 제이미 모이어의 조언으로 그립에 약간 변화를 주면서 제구력과 공의 움직임에 자신이 붙기 시작했다.

팬그래프스닷컴에 따르면 박찬호는 2009시즌 체인지업 구사율이 9.4%로 전년에 비해 두 배이상 많아졌고, 2010시즌에는 14%로 데뷔 후 최고를 기록했다.


박찬호의 체인지업은 좌타자가 볼때 가운데서 약간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면서 떨어지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래서 좌타자들을 상대할 때 효과적인 구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까다로운 좌타자들이 많은 일본리그에서 특히 중요한 구질이다. 물론 오른쪽 타자들에게도 타이임을 빼앗고 땅볼을 유도할 수 있다.

박찬호는 릴리스 하는 순간 오른손을 약간 몸 안쪽으로 틀며 공의 움직임을 조절한다.
중지의 힘을 조절하면서 공의 움직임에 변화도 준다.

박찬호의 체인지업이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생소함이다.
이승엽이 말했듯이 일본리그에서는 박찬호같은 체인지업을 던지는 투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체인지업이 맘껏 춤을 추게되면 박찬호의 일본도전은 더욱 신명날 수 있다.


체인지업은 현대야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투수들의 주무기이며, 변화구 구질은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싱커 이외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스크류볼이나 스플리터같은 구질은 선수생명을 단축시키기 때문에 배울 필요가 없다.

메이져리그에서 부상없이 매년 10승이상을 올리고 명예의전당에 입성한 매덕스와 글래빈이 대표적인 체인지업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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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돌핀스(Taepyungyang Dolphins)는 1982년에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이름으로 창단 시작으로 1985년에 청보 핀토스, 1988년에 인수 창단하여 1995년까지 인천과 경기, 강원지역을 연고지로 존재했던 한국 프로 야구 팀이었다.


태평양 돌핀스 탄생

1987년 10월 21일 태평양화학은 청보로부터 구단을 인수 받는다.
빙그레의 창단전인 1984년에 이북 5도를 대표하는 제 7구단 창단을 희망했던 태평양화학은 창업주 서성환 회장이 황해도 출신으로 경기도에서 성장해 실향민이 많은 인천의 지연관계를 잘살려 새바람을 일으키리라는 기대를 모았다.

박정삼 단장.강태정 감독등 청보의 프런트와 선수단을 그대로 인수한다.

청보로부터 구단을 인수한 태평양그룹은 주력브랜드였던 <아모레>를 그대로 팀 명칭으로 사용하려다가 팬들로 부터 장사속이 지나치다는 빈축을 산다.

그래서 내놓은 대안이 <태평양쾌남>이었는데 "쾌남" 역시 태평양의 남성화장품 명칭이었던 관계로 빈축을 피할 길이 없었다.

결국 기업명칭이 <태평양>인 점과 연고지가 <인천>인 점을 고려해서 바다를 상징하는 팀명칭을 짓기로 하고 공모를 통해 팀 명칭을 <돌핀스>로 채택하게 되었다.

창단 첫해, 1988년 태평양 돌핀스는 7개구단중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다음해 1989년 새로 감독부임한 김성근과 함께 신인투수 박정현-최창호-정명원-양상문으로 이어지는 투수진의 활약을 앞세워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하여 인천연고팀 역사상 최초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하게 된다.

포스트시즌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만나 2승 무패로 승리하여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해태 타이거즈를 상대로 3전 전패를 하게 되어 탈락하게 된다.

그 이후 1990년에서부터 1992년사이동안 정규시즌 5~6위에 그쳐 중하위권 성적에 맴돌았다. 1993년에는 정규시즌 82패를 기록함으로써 꼴찌를 하였다.


투수왕국으로 거듭난 태평양 돌핀스

1994년에 태평양 돌핀스는 돌풍을 일으켰다. 김홍집-안병원-정민태-최창호-최상덕으로 이어지는 선발진에서 정민태만 제외한 나머지 선발 투수들 모두 10승 이상 달성하였고, 오랜기간동안 부상으로 재활을 전전했던 정명원은 마무리 투수로 재기하여 정규시즌에 뛰어난 활약을 보여 최초 40세이브를 돌파하는등 투수 왕국이라 불릴만큼 환상적인 투수진을 구축하였다.

타선에서는 기존의 '물방망이 타선'으로 팀타율이 타팀들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빈약하였으나, 윤덕규-김경기-김동기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는 태평양 돌핀스 타선에 있어서 큰 활력소였다.

태평양 돌핀스는 정규시즌 68승 55패를 기록함으로써 2위의 성적을 기록하였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상대로 3전 전승으로 승리하여 한국시리즈 진출, 인천연고팀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진출하게 된다.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1위였던 LG 트윈스를 맞아 상대하게 되는데,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한 김홍집이 뛰어난 투구를 보였으나, 태평양 돌핀스의 '물방망이 타선'으로 인해 득점지원을 못받았고, 결국 연장 12회말에 끝내기홈런을 맞아 분패하게 된다. 그이후 2차전~4차전까지내내 LG트윈스 기세에 밀려 결국 4전 전패하게 되었고,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1995년 태평양의 홈게임 표

다음해 1995년시즌에는 전체적으로 투-타 밸런스가 엇박자로 갈려 무너졌었다. 선발 투수진으로는 김홍집-안병원-정민태-위재영이 활약하였으나, 최창호,최상덕이 크게 부진하고 부상으로 전력이탈하였다.

타선에서는 윤덕규-김경기-강영수-권준헌으로 이어지는 타선이 분발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물방망이 타선'으로 팀 타율 및 득점이 빈약하였다. 1995년 정규시즌 7위에 그치면서 모기업은 구단운영에 어려움이 생겨 구단매각하기로 결정 하였다.

1995년 9월 11일 현대 그룹에서 태평양 돌핀스를 470억에 인수함으로써 태평양 돌핀스는 1995년 정규시즌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고,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현대 그룹은 현대 유니콘스구단을 창단, 태평양 돌핀스의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태평양 돌핀스의 매각

1992년 2월 태평양 돌핀스가 선경(현 SK)에 매각된다는 소문이 난다.

1991년말 태평양 증권을 선경에 매각할 때 야구단도 매각 대상에 올랐으나 선경측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90년대 들어 시장 개방으로 인한 태평양의 시장 점유율 하락과 야구단 성적의 하락이 맞물려 결국은 구단 매각을 결정한다.

그러다 1995년 8월31일 스포츠서울에 "현대 태평양 인수"란 1면 기사가 난다.


다음날 현대는 태평양 인수 기자회견을 갖았다. 인천 팬들은 8년이나 정을 준 태평양의 매각을 아쉬워 하면서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재계 1,2위를 다투는 현대의 등장을 반긴다.

어느 골수팬 아저씨의 말을 빌리자면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이젠 더 이상 구단의 경영악화로 인한 구단 매각의 아픔을 겪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인천팬들중 나중에 현대가 인천을 헌신짝 차 버리듯 떠나갈 것을 예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곤 아낌없는 사랑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4년후 팬들에게 돌아온 것은 믿었던 현대에게서의 배신뿐이었다.


태평양 구단의 매각 대금은 470억원이었다. 이중 400억은 현찰 지급이었고 70억은 태평양이 청보 인수시 떠 맡은 50억의 부채를 현대가 8년 거치후96년부터 7년간 분활 상환 하기로 했는데 50억의 이자 20억이 붙어 70억이 된것이다.

따지고 보면 태평양은 그동안 부채를 한푼도 갚지 않고 그 부채를 현대에게 넘겨 준 것으로 구단 매입매각에 관한 한 한푼도 들이지 않고 8년동안 야구단을 잘 갖고 놀다 400억을 받고 팔아 버린 것이다.

태평양이 현대에 매각 됐을 때 일각에서는 현대 대신 부평의 대우 자동차를 소유한 대우가 태평양을 인수 했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우도 쌍방울을 인수 하려다 실패했으니까.

하지만 대우가 태평양을 인수 했었도 얼마안가 모기업의 부도에 따른 팀 매각을 추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천 대우 제우스 농구단이 그랬던 것처럼..


태평양 돌핀스 통산 기록

연도 순위 게임수 승률 비고
1988 7위 108 34 73 1 0.319
1989 3위 120 62 54 4 0.533 인천연고팀으로 첫 플레이오프 진출
1990 5위 120 58 59 3 0.496
1991 5위 126 55 69 2 0.444
1992 6위 126 56 67 3 0.457
1993 8위 126 34 82 10 0.310
1994 2위 126 68 55 3 0.552 한국시리즈 준우승(LG 트윈스에게 4:0 패배)
1995 7위 126 48 73 5 0.401

역대 감독
강태정: 1988
김성근: 1989 - 1990
박영길: 1991
정동진: 1992 - 1995

주요 선수
투수: 임호균, 박은진, 김홍집, 박정현, 정명원, 최창호, 양상문, 가내영, 최상덕, 정민태, 위재영, 조웅천
타자: 김일권, 염경엽, 윤덕규, 김동기, 김경기, 김성갑, 곽권희, 원원근, 손차훈, 김용국, 김홍기, 이숭용, 장광호, 김윤환, 권준헌

인천 최초의 프로야구팀 추억의 삼미 슈퍼스타즈
인천 두번째 프로야구팀 추억의 청보 핀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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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1일 청보가 삼미의 야구단 인수를 발표하자, 팬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청보는 50대 기업에도 들지 못하는 생소한 기업이었으니까.

팀의 이름은 청보 핀토스. 핀토스는 북아메리카산 야생마로 영리하고 용맹스런 말이다.
한 마디로 조랑말인 것이다. 얼룩말이라고도 부른다.

왜 하필 조랑말 이었을까? 그건 청보의 김정우 구단주가 당시 대한 승마협회 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직산업이 주력업종 이었던 청보 핀토스는 인천 야구장에서 창단식을 열고 "프로야구에 새 바람을"이란 케치 프레이를 내걸고 85년 후기리그부터 험난한 야구판에 뛰어든다.

청보는 후기리그 개막과 함께 삼성에 2연패한뒤 7월2일 잠실 MBC전을 9:1로 승리하여 창단 첫승을 거둔다.

전반기를 꼴찌로 마감했던 삼미 아니 청보는 김진영감독의 복귀와 함께 후기리그부터 예전의 모습이 사라진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며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한다.

신병기,신태중,좌완 정성만의 역투로 기세를 올리던 청보 핀토스는 7월 24일 인천서 롯데를 7:5로 누르고 후기 2위까지 오르는등 기대이상의 성적을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막판에 힘이 달려 4위로 후기리그를 마쳐 새로운 가능성을 보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핀토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투수 교체시 말을 타고 투수가 등장했다.

전기리그 6위로 꼴지,후리기그 4위로 선전했으나 최종순위는 역시 꼴지. 39승 70패 1무 승률 0.358 의 성적을 거뒀다.

올스타전엔 장명부,김진우,정구선,권두조가 출전했고 골든글러브 시상에선 2루수 정구선이 3년 연속 수상해 그나마 팀의 위안 거리가 되었다.

시즌이 끝나고 청보 김정우 구단주는 놀라운 사건을 하나 터뜨린다. 바로 MBC TV 야구 해설위원이던 허구연을 감독자리에 임명한 것이다.

연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던 김진영감독이 복귀해 새로운 의욕으로 후기리그를 이끌었지만 김정우 구단주는 구단을 인수하며 이미 감독경질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TV해설위원인 허구연의 해박한 야구지식과 자신만만하고 명쾌한 해설에 흠뻑 반해있던 김정우 구단주는 결국 모험을 감행한다.

허구연감독(왼쪽)과 김정우구단주(오른쪽)

10월27일 당시 34세의 지도자 경력이 전무한 야구 해설가 허구연은 야구계에선 드물게 석사학위 소유자이기도 했다.

허구연은 취임후 야구계의 한참 선배들을 코치로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되는데 ,김무관 선수를 코치로 승격시키고, 김명성,강태정,한동화코치를 코칭스텦에 끌어들이는등 대대적인 팀 개편작업을 벌였다.

허구연은 3년 계약에 계약금 3천만원,연봉 3천만원의 조건으로 청보와 계약을 맺았다.


시즌이 끝나자 청보는 폐품이 되어 버린 장명부의 처리문제로 고심하게 된다.

시즌전 연봉계약시 합의한 옵션에 성적이 미달해 장명부는 구단에 4천만원의 위약금을 지불해야할 지경에 처했고, 이에 청보는 장명부에게 엄청나게 삭감된 86연봉을 제시해 장명부가 이를 거부하자 11월22일 미련없이 자유계약 선수로 풀어 버린다.

결국 장명부는 86년엔 빙그레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박정삼단장과 입단에 합의하는 재일동포 투수 김기태(오른쪽)

허구연은 시즌전 제2의 장명부를 기대하며 억대 투수 김기태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재일동포 고광수,김신부와 삼성에서 정현발,김근석을 트레이드 해오는등 의욕적으로 시즌을 맞이한다.

하지만 높은곳의 TV 중계석에서 보는 것과 낮은곳의 덕아웃에서 보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뼈져리게 느끼고 말았다.

삼성과의 개막전에서 6:5로 아쉽게 1점차 패배를 당하고, 2차전에선 10:1로 대패하는등 난조가 계속돼 결국 시즌 개막과 함께 7연패에 빠져 버린다. 이 기록은 각종 연패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인천팀에 시즌 개막후 최다 연패라는 새로운 기록도 선사하는 것이었다. 종전 기록은 84년 삼미의 시즌 개막후 4연패, 82년 삼미의 후기 개막후 8연패였다.

젊은 감독 허구연에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던 인천팬들은 역시나 연패가 계속 되자  "허구헌날 지는 허구연 대신 김진영 감독 대려와라!"며 분개하기 시작했다.

4월6일 빙그레전에서 8회초까지 8:3으로 리드당하다 8회말 3점을 만회한후 9회말 양승관이 끝내기 3점홈런을 한희민으로부터 뽑아 9:8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다. 이렇게 허구연은 시즌 개막후 9일째. 게임수로 8게임 만에 1승을 거두고 기쁨의 눈물을 흘려 버리고 말았다.

청보 핀토스 시구자로 나온 故 이주일씨

하지만 기쁨도 잠시 청보는 다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5월11일 허구연은 8승 23패의 성적을 남기고 단기 일본 유학의 명목으로 지휘봉을 강태정 감독대행에게 넘기고 만다.

허구연은 전기리그가 끝난 6월14일 감독자리에 복귀해 후기리그 개막을 계기로 심기일전해 팀을 이끌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여전히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8월6일 7승2무 17패의 성적을 남긴채 또다시 낙마하고 만다.

통산 15승 2무 40패의 성적을 뒤로한체 지휘봉을 또다시 강태정 감독대행에게 넘기고 "나는 암초를 보지 못한 서툰 선장이었다"란 마지막 말을 남긴체 떠나갔다.

이렇게 해서 인천야구의 전통을 이어 받아 감독 부임 첫해에 사령탑자리를 내어 놓는다.

전임자인 박현식,김진영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허구연감독(가운데), 강태정코치(왼쪽), 김명성코치(오른쪽)

9월16일엔 그동안 허구연 대신 감독대행을 두 번씩이나 맡아오던 강태정 감독대행이 정식 감독자리에 올랐다.

이렇게 한시즌을 허구연의 실험무대로 보낸 청보의 성적은 전기리그 6위(7위 빙그레), 후기리그에선 빙그레의 막판 분전으로 3.5게임차로 다시 꼴찌가 됐다.

하지만 종합순위는 예전과 같이 6위였지만 막내 빙그레 덕에 꼴찌는 면했다.

최종성적 32승 74패 2무 승률 .302.

올스타전엔 최계훈,김진우,정구선,우경하가 나갔고 골든글러브는 구경도 못해 봤다.

올스타전에 출전한 최계훈

시즌전 기대를 모았던 재일동포 억대투수 김기태는 9승14패로 연봉에 상응한 대가를 하지 못했지만 그보다 적은 돈을 주고 데려온 김신부는 10승 10패로 나름대로 괜찮은 활약을 했다.

청보 구단은 86년 한해동안 20억원이란 운영자금을 야구단에 투자 했지만 관중수입이 3억원밖에 되지 않아 17억의 적자를 보았다. 가뜩이나 어려운 청보 그룹에 적자만 쌓여갔다.

시즌전 강태정감독 예상-막내구단 빙그레를 걱정해주고 있다. 자기 앞날은 보지 못하고.

새롭게 정식 지휘봉을 잡은 강태정 감독은 강도높은 훈련과 과감한 트레이드로 돌풍을 예고 한다.

롯데에서 임호균,양상문,이진우,김진근,배경환을 받고 정구선,정성만,우경하를 내주는 5:3트레이드를 했는데 이중 임호균은 친청팀으로 다시 트레이드되는 리턴트레이드 1호가 되었고 임호균과 함께 롯데 박종환 단장의 눈밖에 나 트레이드 되어온 좌완 양상문은 청보의 에이스가 된다.

삼성에선 연봉문제로 갈등을 겪은 이해창을 데려오고 또 삼성에서 정현발,김근석을 데려오는 대신 재일동포 늙은 투수 김기태를 보낸다.

시즌전 예상 라인업

이에 강태정 감독은  "올시즌 목표 승수는 40~45승이다.작년 32승에 정신력 강화로 얻어낼 5승, 선수 보강으로 5승, 이긴 경기 잡지 못한 것 5승을 되찾으면 목표달성은 물론이고 중위권 도약까지 가능할 것이다. 4월4일 첫 경기부터 총력전을 펴겠다. 시즌 첫 승리가 선수에게 주는 영향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올해도 성적을 내지 못하면 우리는 끝장이다. 활기만 찾으면 우리의 뜻대로 해낼 자신이 있다." 며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 새로운 에이스 양상문 투수

팀전력을 강화하고 시즌을 맞이한 청보는 롯데와의 개막전에서 임호균과 양상문 ,김봉근을 줄줄이 투입해 최동원에게 3:1로 승리를 하는 등 2연승을 거두며 처음부터 4승1패의 호조를 보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자 선수단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고 인천 팬들 또한 잔뜩 기대에 부풀어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맛대가리 없는 영라면을 끓여 먹으며 청보의 게임을 지켜 봤다.  하지만 그렇게 순탄하게 시즌을 치뤄 나가기엔 인천야구단의 운명은 너무나 가혹 했던 것이다.

4월14일 모기업 청보식품과 풍한 방직이 은행관리에 넘어간 것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선수단은 사기가 떨어져 4,5월중에만 5연패를 세차례나 거듭했고 5월9일 이후 전기리그가 끝날 때 까지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4월23일 인천 OB전서 8:2로 패한후 5월30일 빙그레전까지 홈 14연패를 당하다 31일 양상문의 구원승으로 홈연패를 겨우 끈었는데, 결국 전기에서는 홈에서 5승 18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다시한번 거두고 말았다.

결국 전기리그를 16승38패로 마감 . 6위 빙그레와는 8게임이나 차이가 났다. 시즌초 선수단의 사기가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은행발표가 좀더 늦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외한 핀토스>라는 말이 돌았는데, 이말은 5월 모기업 풍한그룹이 외환은행의 자금관리를 받게되자 청보 핀토스의 자금 사용도 외한은행 감리단의 결제를 받게된 것을 빗댄 말이었다. 또 '외한 핀토스'가 1승을 더 거둘때마다 구단 판매가가 1천만원씩 올라간다는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전기리그에서 성적이 꼴찌로 떨어지자 인천구장의 관중은 급감하기 시작했다. 결국 빙그레와의 후기 개막전에는 최소 관중 기록인 8백25명만이 인천 공설운동장의 스탠드를 지킬뿐이었다.

썰렁한 인천야구장

후기리그에 들어서 빙그레와의 첫경기를 4:0완봉승으로 이기고 좋은 출발을 보였다.

후기 초반 거둔 6승 5패중 6승이 모두 홈에서 거둔 승리로 이는 전기리그에서 홈에서의 부진 때문에 홈경기에 에이스를 집중투입했기 때문이다. 이중 에이스 양상문이 4승, 임호균, 배경환이 각각 1승씩을 챙겼다.

하지만 3,4연패가 거듭되면서 성적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한때 중상위권의 혼전으로 4위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투타의 균형이 무너져 전력의 한계를 드러내 시즌 막판 MBC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저지하는등 선두권 싸움의 변수 노릇을 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불쌍한 청보 핀토스

후기리그 중반이후 주저 앉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넉넉하지 못한 선발투수들을 초반에 집중투입하는 바람에 15게임이 지나면서 투수력이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허약한 마운드에 에이스급을 한경기에 마구 투입하다보니 다음날 던질 투수가 없었던 것이다.

7월17일 OB와의 경기에선 7:2로 지면서도 이진우,임호균,김신부,정은배등 선발투수급 투수들을 한꺼번에 투입할 정도였다.

도루왕에 오른 이해창

어쨌거나 저쨌거나 출범 당시 50대 기업에도 들지 못하던 청보는 야구단 출범당시 갓 시작한 라면 사업이 실패하고, 주력업체인 풍한산업도 당시 면방직 업계의 불황으로 휘청거린다.

코미디언 이주일이 선전한 열라면

연간 7~10억원의 적자를 보는 야구단의 운영은 벅찰 수밖에 없었다.

청보는 모기업의 경영난으로 87시즌 출범부터 외한은행의 자금관리를 받아오다 7월초에 이르러 구단 매각을 놓고 태평양화학과 3개월간 흥정끝에 시즌 종료 직후인 10월 16일 50억원에 구단을 매각한다.

<핀토스 사세요. 눈물의 세일입니다>

매각대금 50억원은 5년거치 5년 분활 상환의 조건으로, 또 현금이 아닌 부채를 떠 넘기는 것으로 했다. 삼미에서 구단을 살 때보다 10억이나 밑진 것이다.

10월19일 청보 핀토스 해단식-인천 송도 비치 호텔

85년 5월1일 삼미로부터 구단을 인수해 "프로야구에 새바람을"이라는 케치프레이를 걸고 출발한지 2년 반동안 97승 169패 5무 승률 0.365 의 성적을 남긴채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진 구단으로 사라져 버렸다.

청보의 김정우 구단주는 주말마다 야구장 을 찾아 응원할정도로 야구단에 대한 애정이 깊었기에 아쉬움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전신 삼미에 이어 청보 또한 2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머물다 아쉬운 퇴장을 알린다.

인천 최초의 프로야구팀 추억의 삼미 슈퍼스타즈
인천 세번째 프로야구팀 추억의 태평양 돌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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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마일타운

 

삼미 슈퍼스타즈(Sammi Superstars)는 프로야구 원년에 출범했던 추억의 프로야구팀 중 하나이다.

삼미 슈퍼스타즈 구단 선정

1981년 프로 야구 출범 준비 과정중 6개로 나뉜 각 지역의 연고 구단 선정 원칙은 "재무구조가 튼튼한 대기업중 그 기업 총수의 출신도별로 연고지를 정한다" 였다.

경기도,강원도, 이북5도를 연고로 하는 인천팀의 연고 구단으로 제일 먼저 지목을 받은 기업은 현대였다.

정주영회장이 강원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측은 정회장이 88올림픽을 유치한 직후여서 올림픽에 전념을 다 하겠다고 야구단 창단을 거부한다.

두 번째 기업은 한국 화장품이었다.당시 대한 야구협회장을 맡으며 실업팀을 운영하던 임광정회장은 연고지를 서울로 해줄 것과 기존 한국화장품 선수들을 그대고 유지시켜 줘야 한다고 우겨서 결국 실패..


세 번째 기업 대한항공은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으나, 유류파동으로 인한 회사의 적자를 이유로 결국 포기 하고 만다.

이때는 다른 지역의 연고 기업은 거의 확정 상태였는데, 충청도 지역을 맡기로 한 두산이 현대의 불참을 알고는 대전 대신 인천으로 연고로 옮기겠다고 요구를 한다. 하지만 대전 지역을 대신할 기업이 마땅치 않아 3년후에 서울로 연고지를 옮겨주기로 하고 대전지역을 두산에 맡긴다.

1982년 11월에는 인천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은 모두 구단 선정이 완료돼, 인천만 골치덩어리로 남게된다.
결국 준비 위원들은 11월 25일에 정식 모임을 갖기로 하고 만일 그때까지 인천지역을 맡을 기업이 나타나지 않으면 인천은 빼 버리기로 한다.

그런데, 인천 때문에 프로야구의 출범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소식이 나가자 삼미(三美)의 김현철 회장이란 사람이 준비위원에게 전화를 걸어와 인천 지역을 맡겠다고 한것이다.

그 시간은 25일 정식 모임 6시간전인 11시여서 더 극적인 것이였다.

준비 위원들도 처음엔 이름도 잘 들어 보지 못한 삼미 그룹이 참여 의사를 밝혀와 당황하기도 했다. 삼미는 서울에 있는 삼일 빌딩의 소유주로 삼미 철강,삼미 목재,삼미 해운등을 운영하는 기업이었다.


특히 인천에 자리잡고 있는 삼미해운으로 인해 인천에 연고가 있는 기업이기도 했다. 삼미는 대대적인 PR을 요구하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였으나 김현철 회장의 뜻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김회장은 경기중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 대학에 재학중일 때 MLB야구에 심취하기도 한 인물로 당시 나이가 31살밖에 안되는 젊은 회장이었다. 오죽했으면 25일 정식모임에 찾아온 김회장을 아무도 못알아봤을까?

많은 사람들이 삼미가 인천을 자발적으로 맡고 나선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김현철 회장은 두산 박용곤 회장과 대학 선후배 사이로 두산이 인천을 맡으려다 밀리자, 김회장에게 이를 권유해 일이 성사 된 것이라 한다.이렇게 돼서 1981년 12월 11일 프로 야구 창립총회가 열려 프로야구의 출범을 알린다.

이렇게 인천 프로야구는 출발부터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작을 알렸다.

프로야구 개막식


삼미 슈퍼스타즈 구단 창단

1982년 2월 5일 인천 상공회의소 강단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창단식을 갖고 삼미호의 출항을 만방에 알린다. 삼미 슈퍼스타즈(Sammi Superstars) 원년 프로야구선수는 총 23명으로 인천, 경기도, 강원도 지역을 프랜차이즈로 창단했다.


마스코트는 악의 무리에게서 지구를 지키는 "슈퍼맨"

이 얼마나 대단 하고 웅대한가?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다른 팀과 달리 여자 마스코트도 있었다는 것.

바로 "원더 우먼" 일명 원더 빤스로도 불리곤 했다.

'슈퍼스타즈'란 팀명은 김현철 회장이 미국 유학시절 미식축구에 심취해 있었는데, 거
기에서 '슈퍼스타즈'란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창단 첫 해인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첫해에 5개팀들은 국가대표 선수급의 선수들이 각각있었으나, 단 한 팀 삼미슈퍼스타즈는 국가대표급 선수의 부족으로 인해 15승 65패, 승률 0.188이란 성적을 거두며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83년, 재일교포 장명부 투수가 삼미에 입단하여 단일시즌 30승을 올리는 활약과 더불어 새로 입단한 국가 대표 임호균, 김진우 및 정구선 등의 활약을 통해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모두 2위에까지 오르는 이변을 보였으나, 그당시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1위팀끼리 격돌하는 한국 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에이스 너구리 장명부투수의 의지에 따라 팀의 성적이 좌우되었는데, 이듬해 1984년에는 에이스 장명부의 부진과 전체적으로 팀의 부진으로 인해 38승 59패 3무를 기록, 꼴찌를 기록했으며, 이듬해 1985년에는 팀 최다 연패(18연패) 등의 기록을 세우며 최하위권을 맴돌게 되었다.


그럼 삼미의 원년 멤버들을 알아 보자.

*구단주: 김현철
*단장: 이혁근
*감독: 박현식
*코치: 이선덕.이춘근
*투수: 인호봉.이동주.박경호.김동철.이하룡.한상연.김재현.감사용.오문현
*포수: 금광옥.김진철.최영환
*내야수: 김구길.김경남.이철성.송경섭.조흥운.장정기.허운.이찬선.한인철.김무관
*외야수: 양승관.문주모.김호인.이경수.박준영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잘 알려져 있는 감사용도 눈에 뛴다.


삼미 슈퍼스타즈 매각

1985년 전기리그가 끝난 후 청보 그룹에 매각되어 후기리그부터 청보 핀토스가 되었다.

1985년 5월 1일 삼미는 청보 그룹에 팀 매각을 발표한다. 매각의 원인은 84년 6월부터 삼미그룹의 주력회사인 삼미 해운의 적자 누적등 경영난과 성적부진 때문이었다.

1차로 삼미 해운을 처리한 삼미그룹은 84년 그룹의 상징이었던 삼일빌딩을 상업은행에 290억에 매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82~84년 동안에 45억1천만원의 적자를 낸 야구단을 유지 할 수는 없었다.

많은 홍보를 필요로 하는 소비재 분야의 계열사가 전혀없는 삼미 그룹의 성격상 야구단이 창출하는 효과를 전혀 누리지 못한데다 85시즌 개막과 함께 이어진 연패에 넌덜머리가 나 매각을 서두르게 된다.

이때 세운 기록이 18연패로 불멸의 최다연패기록이 된다.

1984년말부터 김현철 회장은 원매자를 알아 본다. 럭키금성(현 LG).한국화약(현 한화).한국화장품.농심등 그동안 프로야구에 관심을 보인 구단에 의향을 타진 했으나, 70~80억원을 요구한 삼미에 반해 삼미의 어려운 사정을 아는 기업들은 40~50억원의 헐값을 요구해 계약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제7구단 창단권을 따낸뒤 가입금 30억원을 놓고 KBO와 실랑이를 벌이던 한국화약은 차라리 인천팀을 인수해 버리고 대전 지역 창단을 포기 할 것도 검토 했으나, 그 역시 가격차이를 좁히지 못해 실패.

청보로 낙찰 되기전 가장 근사치로 접근한 곳은 럭키금성이었다.4월 중순 까지만 해도 양측은 거의 합의점에 이르렀으나 럭키금성이 다시 감가상각비의 명목을 들어 4억원을 더 깍자고 제의해 삼미의 감정을 건드려 무산 됐다.

그러다 청보가 갑자기 등장한 것은 두기업 오너의 학연이 크게 작용했다. 청보 김정우회장과 삼미 김현철회장은 경기고 선후배 사이로 평소 가까이 지내다 김현철의 사정을 알고 선뜻 구단을 인수 하기로 한 것이다. 매각 조건은 70억원 이었으나 현금이 아니라 삼미의 부채를 청보가 떠 맡는 것 이었다.

매각 대금은 70억원으로 발표 됐으나 실제로는 60억원 이었다고 한다.
매각 협상을 끝 마치고 난 뒤 삼미의 김현철 회장은 하염없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얼마나 아쉬웠으면...

이렇게 삼미 슈퍼스타즈는 1982년 2월 5일 구단을 설립한지 1,233일만에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인천 두번째 프로야구팀 추억의 조랑말 청보 핀토스
인천 세번째 프로야구팀 추억의 태평양 돌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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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나 일본의 홈런왕 왕정치는 투수 출신 홈런왕으로 아직도 각 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타자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에도 투수 출신 홈런왕으로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강타자가 있었다.

바로 특유의 '오리 궁둥이' 타법으로 인기를 모았던 김성한이다.


프로야구 원년에 투수로 출전해서 10승을 거두기도 했던 김성한은 1982년부터 95년 은퇴할 때까지 14시즌 동안 207개의 홈런과 143개의 도루를 기록한 호타준족형 타자였다.

1980년대 이만수와 더불어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강타자였던 김성한은 전형적인 클러치 히터로 유독 큰 경기, 중요한 순간에 강한 면모를 과시하며, 해태 타이거즈가 7차례 우승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7번의 한국시리즈에서 기록한 최다 안타(30), 최다 2루타(8), 최다 홈런(4), 최다득점(23) 기록은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김성한은 88년 프로야구 최초로 30홈런을 쳐내며 30홈런 시대를 열었다.

그 다음해에는 26홈런, 32도루로 최초로 20홈런-20도루 클럽을 개설하며, 한국 프로야구사를 새롭게 썼다.
지금이야 홈런 40개도 별 어려움없이 걷어 올리지만, 당시 30홈런은 일대 혁명.

또 20-20이라는 새로운 신세계를 개척하며 현대 박재홍의 30-30의 디딤돌이 됐다.

이 밖에도 정규 시즌 MVP 2회(85, 88년), 올스타전 MVP(92년), 최다 홈런 3회(86, 88, 89년), 최다 타점 2회(82, 88년), 골든글러브 6회(85∼89년, 91년)를 수상했다.

김성한은 또 투수로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프로야구 원년인 82년, 10승 5패 1세이브 방어율 2.88의 수준급 피칭을 하고, 타자로 타율 3할5리, 10홈런, 69타점을 함께 기록한 만능플레이어로 프로야구판에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후 1986년도까지 마운드에 섰다.

김성한은 투수출신이여서 투수를 읽은 눈이 뛰어났다.

대부분의 투수들은 많은 런닝과 강도 높은 체력훈련 탓으로 허리와 하체가 야수들보다 강하며, 상대투수의 마음을 읽은게 다른 타자들보다 앞서기 마련이다.

3차례의 홈런왕과 최초로 한 시즌 30홈런을 돌파하며 프로야구에서 대성했지만, 한·미 대학선발팀에 나간 것이 대표팀 이력의 전부일 정도로 대기만성형 선수였다.

 그래서, 82년 프로에 입단할 때의 계약금, 연봉으로 1천2백만원씩 받았는데 2천만원을 넘게 받는 동료들이 바라보며, 입단 때 받았던 설움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의 오기와 집념은 대단했고 그것이 오늘의 김성한을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김성한은 군산 중앙초등하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 군산상고를 거치면서 군산야구의 대표적 인물로 우뚝서며,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등 역전의 명수란 신화를 낳은 선배들을 제치고 가장 화려한 프로야구 경력을 지닌 선수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김성한은 당시 상대팀 투수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던 해태의 KKK타선(김일권,김종모,김준환,김봉연,김무종 등)중에서도 핵심으로 맹활약한다.

해태 타이거즈 투타의 핵이였던 선동열과 김성한

대타자 김성한에게 가장 까다로운 투수는 누구였을까?

그는 서슴없이 최동원을 꼽는다. 선동열은 같은 팀이기 떄문에 상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동원처럼 변화구 낙차가 크고 스피도도 있으면 서 제구력과 두둑한 배짱을 지닌 투수도 없었던 것 같다고 평한다.

별명은 오리궁둥이이다. 이 별명은 그의 특이한 타격폼 때문에 붙은 별명인데, 김성한은 다른 타자들과 달리, 마치 일본도를 잡는 자세와 같이 배트를 뒤로 젖힌 상태로 공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칠 때의 엉덩이가 뒤로 빠지면서 뒤에서 볼 때 오리의 엉덩이와 흡사하여 붙여졌다.

그의 등록상표처럼된 오리궁둥이 타법은 대학교 3년때부터 시작되었다.

동국대학 시절 배성서 감독(전 빙그레감독)은 방망이가 처져서 나오니 아예 미리 처진 상태에서 공을 떄리는 주문을 했고, 그것을 김성한은 나름대로 잘 소화하여 된장 뚝배기 맛을 내는 독특한 자세를 완성시킨 것이다.

간혹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 가운데 김성한처럼 독특한 타격폼을 가진 선수들이 있는데, 그것은 빠른공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단축의 효과를 노리기 때문이다.
큰 엉덩이를 축으로 뽑아내는 그의 가공할만한 장타력은 안쪽 바깥쪽을 가리지 않고 공을 넘겼다.

1991년 한일 슈퍼게임때 일본의 내노라는 투수들을 처음 대하면서도 3개의 홈런을 좌우로 떄려낸 것은, 공을 몸 가까이 붙여 놓고 떄릴 수 있는 김성한 타법의 장점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맹활약으로 인해 그의 배트는 일본 야구 박물관에 헌액되었다.


김성한은 프로야구 원년부터 맹활약하며 타격 전분야에 걸쳐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다재다능함은 '오리 궁둥이'이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을 정도로 한곳으로 초점을 맞추지 못하게 한다.

다재 다능함으로 강렬한 이미지 형성에 손해를 본 김성한의 대표적인 사례 한가지.

프로야구 초창기, 지명타자로 나섰다가도 팀이 위기에 몰리면 마운드에 나섰던 그는 3루수는 물론 1루수까지 맡으며, 1982년 올스타전의 인기 투표에서 총득표 순위 3위를 마크했지만, 투수에서 2위, 지명타자에서도 2위, 3루수에서 4위 등으로 지명되어, 결국 감독 추천으로 서군의 투수로 지명되었다.

김성한의 이러한 '이미지 난'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부분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그가 14년간 소속되어있던 해태 타이거즈.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어버리는 Red & Black 유니폼을 입고 뛰던 당시 통산 7차례나 한국 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던 독특한 팀 컬러의 해태 타이거즈에 소속이었다는 점 역시 김성한 개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걸림돌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해태가 어떤 팀인가?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이란 대기록 앞에 감히 일개 개인의 영광이나 기록이 더 위대할 수 없었고, 당시 해태에는 수많은 슈퍼스타들이 즐비해서 김성한의 해태가 아닌 해태의 김성한일 뿐이였다.

만약 그가 다른 팀에 소속이었다면 1980년대를 풍미한 최고의 타자로 첫손가락에 뽑힐지도 모르지만, 김성한 본인도 그런 가정은 원치 않을 것이다.

우승의 영광을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을 게 분명한 김성한이기 때문이다.

김성한은 1995년에 14년간의 프로야구 생활을 뒤로하고 은퇴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6년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코치수업을 받으면서부터 제 2의 야구인생을 펼치기 시작했다. 미래의 호랑이군단 사령탑으로 재탄생하기 위한 담금질이 스타트 된 것이다.

이후 김성한은 해태 코치로 97년부터 4년간을 보낸 뒤 김응용 감독의 바통을 이어받아 마침내 명문 해태구단의 감독 자리에 올랐다.

하위권에 맴돌던 팀을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2004년 시즌중반 성적부진에 의해 경질되었고, 2005년 현재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의 감독을 맡았으며, 최근에는 KBS 2TV에서 방송중인 천하무적 야구단에서 가끔 객원해설을 하기도 하였지만, 현재는 기술고문 겸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형적인 클러치 히터로 유독 큰 경기와 중요한 순간에 강한 면모를 과시하며, 해태 타이거즈 7번 우승의 주역이였던 김성한.

특유의 '오리 궁둥이'폼과 함께 프로야구가 배출한 최고의 타자중 한명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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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8년 전. 시골 한 조그만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습니다. 교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야구부원들의 훈련 모습이 너무 멋있어 야구부에 찾아갔습니다. 그 아이는 마냥 야구가 좋고 신기하기만 했습니다.그렇게 바로 제 야구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연습생에서 한국 최고의 타자로

1986년. 한국 프로야구에 ‘제7구단’ 빙그레가 창단하게 되었다.

장종훈은 1986년 세광고를 졸업하게 되었고 갈만한 대학팀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세광고감독이 빙그레 배성서 감독에게 부탁. 입단테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빙그레는 기반없이 새롭게 창단한 구단이었기에 한명의 선수도 아쉬운 입장이었다.
장종훈은 당시 300만원의 연봉을 받고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다.

이듬해 장종훈 선수가 퇴출대상으로 분류되자, 당시 배성서 감독이 이재환 수석코치에게 부탁하여 이재환 코치가 구단 고위층을 은밀하게 만나서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하여 겨우 팀에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식선수가 되는 행운을 잡게 된다. 게다가 당시 주전을 맡고 있던 이광길선수가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장종훈은 선발출장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장종훈은 데뷔 첫해 94경기에 출장해 0.270 타율, 홈런 8개와 34타점을 기록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1988년에는 전년도보다 더 많은 108경기에 출장해서 0.241의 다소 낮은 타율을 기록했으나, 홈런 12개와 57타점을 기록하며, 유격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는다.

1989년에는 112경기에 출전해 타율 0.254, 홈런18개, 46타점을 기록하면서, 당시 폭발적인 타력을 자랑하던 빙그레 이글스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중심으로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부터 92년까지 3년간 홈런과 타점 부문 타이틀을 3연패하며 국내 최고의 슬러거로 발돋움한다.

더욱이 프로야구 원년부터 한시즌에 30홈런을 넘긴 선수도 3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극소수였던 92년에 마의 벽으로 생각되던 40홈런을 프로야구 최초로 넘은 것은 대단한 기록이였다.

91년과 92년에 연속으로 최우수선수(MVP)의 영광을 차지한 장종훈은 골든글러브도 5차례나 수상하며 90년대 중반까지 프로야구의 간판스타로 군림한다.

빙그레 이글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핵심이였던 장종훈

가공할만한 3시즌을 보내고 맞이한 93년.
개막전 홈런이 비로 인한 노게임으로 묻혀버렸고, 비운의 출발과 함께 장종훈은 겨울내내 따라다니던 왼쪽 무릎부상으로 인한 런닝 부족으로 부진한 시즌을 보낸다.

94시즌도 마찬가지였다. 팀은 시즌3위로 PS에 진출했지만, 93시즌에 기록한 17개 홈런에서 7개나 줄어들어 고작 10개를 기록했고, 34타점으로 최악의 4번타자로 전락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90~92시즌 보여줬던 장종훈의 폭발적인 타격과 거리가 멀었던 2시즌이었다.

최악의 2시즌을 보내고 95시즌 장종훈은 화려한 부활을 한다.
하지만, 95시즌을 시작으로 널뛰기 성적이 시작되었다.

전경기 출장과 0.326 타율, 홈런22개, 78타점으로 왕년의 장종훈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96시즌 90경기, 0.266, 홈런 15개, 57타점으로 부진하더니,
97시즌엔 121경기, 0.293 타율, 홈런 22개, 76타점을 정상급 활약을 펼치고,
98시즌에는 118경기, 0.275 타율, 홈런 17개, 66타점을 기록했다.


우승의 영광

99시즌 한화로써의 최고의 시즌이었다. 빙그레 이글스 시절부터 계속된 만년 준우승팀이라는 꼬리표를 떼는 시즌이었고, 정민철의 해외진출을 앞두고 있었던 중요한 시즌이었다.

한화는 로마이어-데이비스. 용병듀오와 함께 중심타자 장종훈 등을 앞세워 탄탄한 공격력을 형성했고, 구대성-정민철-송진우등의 라인을 구성하며 막강투수진을 자랑했다.


장종훈은 126경기에 출장. 0.284 타율, 홈런 27개, 86타점을 기록하며 용병듀오에 밀리지 않는 성적을 냈다.

한화는 어렵게 PS에 진출하게 되었다. 양대리그제도 첫해였던 당시, 한화는 PO에서 두산을 만나 가볍게 제압하며 KS진출을 하게 된다.

한화의 상대는 삼성과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이고 온 롯데. 롯데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전력상으로도 한화보다 아래에 있었다.
한화는 4승1패로 손쉬운 승리를 거두며 프로통산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비록 장종훈은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한 성적을 냈지만 맏형으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줬다.

1999년 한화 이글스 감격의 우승

장종훈은 우승의 감격을 2000시즌까지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타율0.264로 조금 떨어지기는 했지만, 홈런 28개와 81타점으로 한화의 중심타자로 활약을 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장종훈은 체력적인 열세를 드러내며 하향곡선을 그린다.
2001시즌 0.273 홈런 15개 54타점을 기록했고, 2002시즌은 경기출장수도 약 20경기 줄어든 101경기에 출장 0.248타율 홈런12개 42타점 마크했다.


기록의 사나이 마침내 은퇴

2003시즌 한화는 유승안 코치를 감독으로 내정한다.

신임 유승안 감독은 팀의 체질개선을 선언했고, 화끈한 공격의 야구를 부활시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승안의 ‘체질개선’이라는 말 속에는 배터랑선수들은 모두 정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첫 번째 수순으로 장종훈이었다.

한때 같이 선수생활을 한 유승안 감독과 장종훈

3루수로 뛰었던 신예 김태균을 수비불안의 이유로 1루수로 수비를 전향시키고 장종훈은 백업으로 밀린다.

전반기에 백업으로 출전하고 후반기에 주전으로 기용되어 83경기에 출장하면서 0.243타율 홈런6개 27타점을 기록했다.

2004시즌엔 70경기에 출장해 0.255 타율, 홈런 6개, 27타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2005년에도 부진이 계속되자,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장종훈은 1990년대 명실공히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간판타자였다.

90년대에만 골든글러브 4차례 수상. MVP 2회수상. 최다안타 1회. 홈런왕 3회. 타점왕 3회. 득점왕 2회, 장타율 4회. 출루율 1회 등 무수한 타이틀을 차지했다.

또한 장종훈은 개인통산 최다인 1천949경기에 출장해서 6천290타수 1천771안타로 통산 타율 0.282, 340홈런, 1천145타점을 기록했고, 홈런과 타점, 득점, 경기, 타수, 안타, 4사구에서 심지어 삼진까지 타격의 각종 기록에서 통산 1위에 올라 있는 말 그대로 '기록의 사나이'이다.

빙그레 이글스 시절부터 투타의 핵이였던 장종훈과 송진우

꼭 시골에서 금방 올라온 학생처럼 너무 착하게 생기고, 심성도 너무 착해 '촌놈'이라는 정겨운 별명도 가지고 있는 장종훈 선수는 기록도 기록이지만, 유일무이한 연습생의 성공신화를 이루며, 2군에 뛰고 있는 젊은 선수한테 많은 꿈과 희망을 주기도 했다.

2군에서 연습생으로 선수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역할을 했던 장종훈이 한국 최고의 타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피나는 노력과 불굴의 의지로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이었다.

올스타전에서 경기끝난후 헹가래받는 장종훈

 "20년전 프로야구에 첫 발을 내딛던 연습생의 마음처럼 이제는 최고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그 때의 그 마음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겠습니다. 팬 여러분께서 저에게 보내 주신 사랑은 평생 잊지 못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팬 여러분께서 보내 주셨던 과분한 사랑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졸출신 연습생선수로 들어와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고 대기록을 남긴 장종훈.
진정 프로야구가 낳은 이 시대 최고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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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63년 1월 10일(양력)

출신교 : 광주무등중-광주일고-고려대

입단연도 : 1985년

체격 : 184cm, 87kg

포지션 : 투수

투타 : 우투우타

별명 : 국보, 멍게, 무등산 폭격기, SUN (나고야의 태양, 주니치의 수호신) 등

주요수상 : 프로야구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3회, 골든글러브 6회, 3년 연속 투수 4관왕, 0점대 방어율 3회 등

선동렬을 가리켜 '국보급'이라고 한다.
이 말은 그가 20세기,한국야구 100년사에서 최고의 투수라는 것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다.

물론 어느 한때 그에 필적할 만한 업적과 기록을 남긴 투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고교,대학,프로를 거치며 최고였고,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정상에 선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광주일고 시절, 호리호리한 체격에 얼굴에 여드름투성이였던 '멍게' 선동렬은 타고난 유연성으로 강속구를 뿌려댔다.
그리고, 고 3때 팀선배였던 방수원씨(전 해태투수코치)에게 전수받은 슬라이더를 선동렬식 '칼날 슬라이더'로 완성시켜 전국대회 우승과 노히트노런 달성으로 한국 최고투수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82년 우승을 차지한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고려대 2학년인 선동렬의 독무대였고, 84년 LA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LA 다저스에서 당시 50만달러의 거액을 제시하며 스카우트에 나서기도 했다.
러나, 해태에서 국보는 한국에 있어야 한다며 적극 말려서 선동렬은 85년 입단 파동을 겪고 난후, 프로야구 최초로 억대 계약금을 받고 후반기부터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

데뷔전에서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좌완 김일융(당시 삼성)과의 맞대결에서 패전의 쓴맛을 봤지만, 시속 150Km를 상회하는 강속구에 직구와 구분하기 어려운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시즌 첫해 방어율왕을 차지한다.

다음해인 86년부터 49 1/3이닝의 연속이닝무실점 기록을 세우고, 4월 19일 롯데전에서는 라이벌 최동원투수와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전을 펼치며, 1대0 완봉승을 거두고 당대 최고 투수중 한명이였던 최동원의 12연승 행진을 깬다.

선동열과 최동원은 아직까지도 프로야구가 배출한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에 방어율부문 3연패와 더불어 방어율 0.99 0.89의 불멸의 전설적 기록을 남겼으며, 무실점, 무홈런, 무4구의 3무 투수로 불리기면서 국민적 영웅의 입지를 굳힌다.

92년 시즌중에 부상을 당해 93년부터 마무리 투수로 전향한 선동열은 철벽 마무리로서 위용을 과시하며,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상대팀이 경기를 포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선동열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11년동안 해태 타이거즈는 세계 어디에도 유래가 없는 단기간동안 최다 우승을 차지하였다. (선동열이 선수 생활 하는 동안 6번 우승 - 86, 87, 88, 89, 91, 93년)

1990년대 중반까지 프로야구계의 절대강자였던 선동열과 해태타이거즈


주요타이틀 수상만 보면 MVP수상 3회(86,89,90) , 골든글러브 6회(86. 88, 89, 90. 91. 93), 3년연속 투수 4관왕(89,90,91), 92,94년을 제외한 9시즌동안 방어율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특히 불멸의 0점대 방어율은 3번(86,87,95)씩이나 해내었다.

통산 141승 37패 99세이브 , 방어율은 1.25를 기록한 선동열은 1996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런 뛰어난 기록들을 수립하고 일본으로 건너난 선동열은 센트럴리그 주니치(中日)드래곤즈에 입단해 일본 데뷔 첫해 쓰디쓴 맛(38경기 5승1패8SP. 방어율 5.50)을 본다.

일본 진출 첫 해인 96년에는 낯선 무대에 적응하지 못해 참담한 성적을 남겼지만, 97년 재기에 성공해 주니치의 확실한 마무리 투수가 됐고, 일본 정규시즌 최다 세이브포인트 신기록인 38SP를 기록하며 '나고야의 태양'이라는 인상을 확실히 각인 시켜줬다.

97시즌 토탈성적은 43경기 출장 1승1패38세이브 방어율 1.28. 1년전 '선동열도 끝났다'는 주위의 평가를 통쾌하게 복수(?)한 것이다.

98시즌엔 더욱 심기일전하여 3승무패29세이브(42경기) 방어율도 1.48. 이번엔 '역시 선동열'이란 찬사가 줄을 이으면서 동열불패(銅烈不敗)라는 신조어가 매스컴을 장식했다.

나고야의 수호신으로 활약한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의 선동열


세기말 99시즌. 개인의 성적도 성적이지만 팀 우승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선동열은, 이종범(제이리),이상훈(삼손리) 등 주니치내 '코리안 삼총사'와 함께 소속팀인 주니치 드래곤즈가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한몫을 크게 담당하였다.

시즌 성적은 1승2패 28세이브 (방어율 2.61). 야쿠르트의 다카쓰 신고에게 구원왕 타이틀은 내준 것은 너무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래도 선동열은 센트럴리그 챔피온이 결정되는 시합인 9월30일의 대 야쿠르트전(진구구장)에 마무리로 등판, 도아게투수가 되며 감격의 'V포옹' 주인공이 됐다. 인터뷰에서 그는 "일본 진출이래 가장 긴장한 경기였었다"라고 토로했다.

선동열의 일본 성적은 10승4패98세이브. 100세이브에 2개가 모자란다. 일본프로야구 개인통산 세이브 부문 11위의 기록이고, 외국인 투수 가운데는 곽원치(郭原治.전 주니치. 현 대만프로야구)의 116개에 이은 두번째 기록이다.

34세의 늦은 나이에 일본에 진출해서 그만한 성적을 남겼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기록이다. 일본의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알고 있는 한국인 이름을 대라고 했더니 대다수가 '선동열'이라고 말했다는 것이 결코 과장은 아니다.

주니치를 우승으로 이끌고 은퇴한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


그 해 1999년 11월 선동열은 15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너무 빠른 은퇴였을수도 있지만 선동열이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해태 타이거스 입단 이후 11년 동안의 국내 프로생활과 96년 이후 일본에서 4년 등 총 15년 동안의 화려했던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은퇴 후 일본 주니치 드래곤츠 프로야구팀의 코치를 맡았으며, 2000년부터 한국야구위원회(KBO) 홍보위원으로 활약했다.

2004년 삼성 라이온즈 프로야구팀의 수석코치를 맡았고, 같은 해 11월 김응용 감독이 삼성구단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선동렬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어 2010년까지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2번의 우승을 이루어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선동열(세례명 : 다두)은 매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상당한 금액을 명동성당에 희사하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그러나, 선동열로선 또다른 꿈이 있다. 바로 한국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되는 (가칭)'선동열상'의 제정이다. 미국의 사이영상, 일본의 사와무라상과 같은 의미다.

어떠한 수식어로도 모자랄 정도로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불멸의 기록을 남긴 '선동열'이라는 이름 석자는 결코 잊을수 없을 것이다.


선동열 주요 수상 :
1981년 세계 청소년 야구 대회 MVP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MVP
86, 88, 89, 90, 91, 93 한국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수상
86년 투수 삼관왕(방어율, 다승, 탈삼진), 페넌트 레이스 MVP
87년 승률, 방어율 1위
88년 방어율, 탈삼진 1위
89년 투수 사관왕(승률, 방어율, 다승, 탈삼진), 페넌트 레이스 MVP
90년 투수 사관왕(승률, 방어율, 다승, 탈삼진), 페넌트 레이스 MVP
91년 투수 사관왕(승률, 방어율, 다승, 탈삼진)
93년 방어율, 구원 1위
95년 구원 1위
95년 12월. 일본 프로야구 진출
97년 일본 프로야구 구원 2위


선동열 주요 기록 :
시즌 최고 방어율= 93년 0.78
경기 최다 투구수= 232개 (87.5.16 사직구장, 롯데전) 상대투수 최동원
시즌 최다 완봉승= 86년 8회
연속 경기 완봉승= 3경기 (86.8.31- 9.11)
홈경기 연승= 14경기 (88.7.27 - 89.10.2)
특정 팀 상대 연승= 롯데전 20연승 (88.8.11-일본 진출전),
태평양전 14연승 (87.8.19-90.5.9)
연속 경기 무패= 44경기 (91.8.20-93.7.14)
연속 경기 세이브= 11경기 (92.7.7-93.4.1)
연속 경기 SP= 18경기 (92.7.7-93.5.15)
노히트노런 : 89.7.6 광주 삼성전
최다 타석 무홈런= 319이닝 (89.5.29-90.9.25)
경기 최다 탈삼진= 18개 (91.6.19 광주 빙그레전 13회 연장)
연속 타자 탈삼진= 9명 (95.8.23 쌍방울전 4명, 95.8.27 한화전 5명),
9명 (95.9.7 삼성전 5명, 95.9.12 삼성전 4명)
선발 타자 전원 탈삼진= 3회
매회 탈삼진 + 선발 전원 탈삼진= 1회 (92.4.11 잠실 OB전)
연속 이닝 무실점= 49 2/3이닝 (86.8.27-87.4.12)
특정팀 연속 이닝 무실점=삼성전 42이닝(86.5.25-88.4.2)

선동열 프로야구 통산기록

연도 소속 방어율 경기 승리 패전 세이브 이닝 안타 4구 삼진 실점 자책
1985 해태 1.70 25 7 4 8 111 74 23 103 30 21
1986 해태 0.99 39 24 6 6 262 2/3 153 59 214 38 29
1987 해태 0.89 31 14 2 6 162 89 50 144 21 16
1988 해태 1.21 31 16 5 10 178 1/3 116 42 200 29 24
1989 해태 1.17 36 21 3 8 169 82 55 198 27 22
1990 해태 1.13 35 22 6 4 190 1/3 121 58 189 35 24
1991 해태 1.55 35 19 4 6 203 135 33 210 42 35
1992 해태 0.28 11 2 0 8 32 2/3 20 12 42 1 1
1993 해태 0.78 49 10 3 31 126 1/3 48 26 164 11 11
1994 해태 2.73 27 6 4 12 102 1/3 81 29 94 31 31
1995 해태 0.49 48 5 3 33 109 1/3 49 17 140 9 6
통산 1.20 367 146 40 132 1647 968 404 1698 274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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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프로야구계 최대 이슈는 제 8구단의 창설이었다.

1986년 빙그레가 창단되면서 프로야구팀이 7개팀으로 운영되다 보니 하루에 한팀씩은 경기를 치룰 수 없는 절름발이식 경기스케쥴이 문제가 되어 제8구단 창설이 이슈가 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KBO이사회는 제 8구단을 창단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대상기업의 자격에 대한 원칙을 세운다. 다음은 당시에 세워진 창단에 대한 기본원칙이다.

▲가입업체 기준은 기업 전체의 연간 매출액이 5천억원 이상이어야 하고 프로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기업.

▲가입조건은 프랜차이즈 안에 현대식 구장을 확보하고 50억원 이상의 가입금을 낼 것.

▲창단시기는 가입희망 기업을 확정한 후 단시일 내에 한다.

▲선수확보 방안으로는 각 구단이 필요로 하는 22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 중에서 신생구단이 2명씩 지명트레이드 할 수 있다.

▲신생팀 창단 후에는 8개 팀을 2개 리그로 분리운영하고 다른 리그에 속한 팀과도 대전하되 한국시리즈는 양리그 우승팀간에 치룬다.


창단에 대한 세부원칙이 정해지고 먼저 제 8구단 창단에 나선쪽은 한일합섬이었다. 한일합섬은 열성적인 야구팬이 많은 마산과 경남을 연고로 89년 3월 22일 창단신청서를 낸 것이었다. 이어서 쌍방울과 미원이 연합기업형식으로 쌍방울 70%, 미원 30%의 비율로 투자한다고 밝히고, 같은 해 4월 10일 전북을 연고로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겠다고 창단신청서를 제출한다.

당시 한일합섬은 팬들의 호응도와 시장능력, 장기적인 팀간 전력 균형등 여러 방면에서 전북에 기반을 두고 창단하려 한 쌍방울-미원 연합기업보다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4월 말 한일합섬이 "표대결을 벌이면서까지 프로야구단을 유치할 생각은 없다"며 창단을 백지화했고, 결국 쌍방울은 그 해 7월 8일 임시구단주 총회에서 6표를 얻어 국내 프로야구 제 8구단 창설권을 획득했다. 그 당시 일각에서는 한일합섬의 창단 백지화 선언이 정치적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나하는 추측도 있었다.


레이더스의 태생적 한계

따지고보면 태생이 불순했던 레이더스였다.
레이더스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스포츠인 프로야구에서 정치적인 논리로 탄생된 팀이였다.

당시 쌍방울이 전북을 연고로 프로야구단을 창단하면서 호남지역의 단결력을 줄이기 위해 전북지역에 야구단을 둔다는 루머가 급속도로 퍼져나갔었다.
더구나 연합기업으로 창단신청서를 제출했던 미원이 레이더스가 해체되던 순간까지 단 한차례도 야구단 운영에 참여하지 않은 사실을 보면 더욱 설득력을 가졌다.

또한, 제 8구단 창단 조건으로 연간매출액 5천억원 이상의 기업 등 3가지 조건이 제시됐으나 쌍방울은 자격미달이었다.
당시 쌍방울는 내의전문업체에서 토탈 패션업체로 발전하였고, 무주리조트를 개발하는 등 레저산업계의 총아로 발전하면서 내실이 단단한 그룹으로 평가받고 있었지만, 구단주총회에서 제시한 가입조건에는 미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구단들은 쌍방울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4차례 연속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등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던 해태 타이거즈를 견제하기 위해선 전남북을 쪼개야 유리하다는 계산속에 쌍방울의 창단에 동의했던 것이다.

당시 쌍방울은 50억의 창단가입금을 냈고, 이중 20%인 10억을 연고지의 일부인 전북을 내어준 해태가 챙겼다.
해태 타이거즈는 10억에 자신의 한쪽팔을 내어줬고, 레이더스의 해체이후에 다시 찾게 된다.

레이더스 프로무대 성적표

레이더스는 지난 90년 창단을 선언하고 그해 2군무대에서 우승을 거둔 뒤 91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프로에 참가한다.
다음표는 99년을 끝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진 레이더스의 통산 성적표다.

연도

소속

경기

승률

순위

안타

홈런

도루

타율

방어율

1991

쌍방울

126

52

71

3

0.425

6

1041

87

130

0.253

4.69

1992

쌍방울

126

41

84

1

0.329

8

1015

90

89

0.249

4.85

1993

쌍방울

126

43

78

5

0.361

7

903

46

117

0.225

4.00

1994

쌍방울

126

47

74

5

0.393

8

1027

87

151

0.248

4.74

1995

쌍방울

126

45

78

3

0.369

8

1054

83

131

0.254

4.67

1996

쌍방울

126

70

54

2

0.563

3

1085

58

85

0.264

3.33

1997

쌍방울

126

71

53

2

0.571

3

1090

110

81

0.269

3.82

1998

쌍방울

126

58

66

2

0.468

6

1089

101

93

0.261

4.04

1999

쌍방울

132

28

97

7

0.224

8

1108

86

126

0.248

5.85

통산

 

1140

455

655

30

0.410

9412

748

1003

0.252

4.60


레이더스는 9년동안의 프로무대에서 대부분 하위권이었다. 하지만 96년과 97년 레이더스는 돌풍을 일으키며 2년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그 시절 레이더스는 '공포의 외인구단'이라 불리웠다.


96, 97시즌 레이더스의 돌풍

◀ 쌍방울 레이더스 돌풍의 주역인 김성근 감독

95년 8개팀 중 8위를 차지한 레이더스는 김성근씨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하고 96시즌을 시작한다.
91년 프로무대에 뛰어든 이후 5시즌 동안 세 차례 꼴지를 포함, 매시즌 6위이하의 성적을 거두던 레이더스는 김성근을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하고 신인 스카우트에도 지난 96년(4억여원)보다 4배나 많은 15억여원을 투입하는 등 의욕적으로 시즌을 시작하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은 95년 11월부터 5개월여동안 일본 오키나와에서 지옥훈련을 펼치며 96시즌 레이더스의 돌풍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고 시즌에 돌입한다.

시즌 전 전문가들은 레이더스를 타이거즈와 함께 하위권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레이더스는 광주에서 해태와의 개막 2연전을 모두 승리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갔고, 4월 26일에는 선두에 올라서는 등 96시즌 초반부터 돌풍의 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시즌 내내 상위권을 유지하던 레이더스는 결국 70승 54패 2무의 성적으로 해태에 이어 시즌 2위로 창단 후 첫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다.

레이더스의 돌풍은 플레이오프에서도 이어졌다. 시즌 성적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현대가 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를 승리로 거두고 레이더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었다.
레이더스는 현대에 먼저 2게임을 승리한다. 한국시리즈 진출의 9부능선을 넘은셈.

언론에서는 해태와 쌍방울의 사상 첫 호남선시리즈가 시작될거라며 흥분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신생팀 현대가 막판 무서운 저력을 발휘하며 3연승, 레이더스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무산시킨다.

96시즌 레이더스는 비록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하지만, 만년하위팀의 꼬리표를 떨쳐 버린 의미있는 한해였다.

이듬해인 97시즌 레이더스는 이렇다 할 전력보강을 하지 못했다. 신인 중에는 좌완 투수 오상민 정도가 눈에 띄었고 영입선수로는 은퇴를 목전에 둔 한대화, 김성래, 이종두등이 있었다. 시즌 초 전망도 전년도 패넌트레이스 2위라는 성적이 무색하게도 최하위권으로 분류됐었다.

예상대로 레이더스는 97시즌 시범경기에서 1승 8패의 참담한 성적을 기록하며 시즌 전망을 어둡게 했다. 설상가상 특급마무리 조규제와 선발의 한 축을 담당하던 박성기가 부상으로 전력에 구멍이 생겼다. 지난해 레이더스 신인 중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석수철마저 부상으로 전력에서 완전 이탈하고 말았다. 또한 96시즌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특급포수로 성장한 박경완마저 시범경기에서 오른쪽 팔꿈치부상을 당했다. 그야말로 초상집에 불난 격이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자 레이더스는 저력을 보였다. 개막 후 LG와 OB를 상대로 4승 1패를 기록하며 돌풍을 시작했다. 지난해 8월 11부터 시작된 홈경기 연승기록을 17로 늘렸다. 불과 얼마전 시범경기 1승 8패의 성적을 기록했던 팀으로는 믿기지가 않는 놀라운 상승세였다.

결국 레이더스는 97시즌에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 71승 53패 2무 시즌 3위였다. 시즌 초부터 끊이지 않았던 부상선수 속출과 시즌 막판 팀매각계획 발표 등 온갖 악조건을 딛고 2년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오봉옥, 김기덕, 성영재, 박성기 등 주축투수들의 잇따른 부상이라는 악재도 레이더스의 저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시즌순위도 초반 5위에서 7월경 4위로 끌어올렸고, 결국 정규시즌을 3위로 마감해내는 불굴의 투혼을 발휘했다. 비록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1승2패로 패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레이더스의 투혼은 충분히 박수받을 만한 결과였다.

데이터 야구 김성근 감독, 90년대 최고 좌타자 김기태, 특급마무리 조규제, 97시즌 다승왕 및 방어율왕, 승률왕에 빛나는 김현욱, 리그를 대표하는 포수로 성장한 박경완, 어린왕자 김원형, 이적생 김성래, 김광림, 박노준, 오봉옥, 이밖에 김실, 심성보, 조원우, 박성기, 성영재, 김기덕등 이 시기 레이더스의 돌풍의 주역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불굴의 투지로 똘똘 뭉쳐있었다.


간판 선수의 잇따른 현금 트레이드

◀ 쌍방울 레이더스의 에이스였던 어린왕자 김원형

레이더스는 96, 97시즌 2년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등 재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모기업인 쌍방울이 부도처리되면서 팀매각을 공식선언했고 97시즌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던 간판선수들을 타구단으로 현금 트레이드하기 시작했다. 팀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97시즌 말미에 한대화, 박노준, 이종두등 노장선수 3명은 은퇴의사를 나타냈고, 2년연속 포수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인 박경완은 현대에 현금 9억원에 트레이드 됐다. 이밖에 한기철, 김미호등 9명은 보류명단에서 빠졌다. 이 와중에 새롭게 시행되는 용병제도에도 불구하고 레이더스는 국내 8개구단 중 유일하게 용병영입을 하지 못하고 98년 새해를 맞이했다.

새해를 맞이해서도 레이더스는 추가로 몇몇 선수를 임의탈퇴로 공시하고 98선수단 규모를 47명으로 운용하기로 결정한다.

얼마뒤에는 레이더스 1차지명 선수인 조진호가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을 맺는다. 쌍방울로써는 파격적인 2억원의 계약금을 제시했지만 조진호는 2억원으로는 병중인 아버지의 병원비에 부족하다며 5억원을 요구, 결국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결국 레이더스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98시즌을 시작하고 98시즌 동안에도 특급마무리 조규제를 현대에 현금 3억 + 전주구장 광고협찬 3억 + 가내영, 박정현과 트레이드한다. 이해 레이더스는 58승 66패 2무의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순위 6위를 차지하며 시즌을 마감한다.

시즌이 끝나자 레이더스는 다시한번 팀운영자금을 마련하기위해 김기태와 김현욱등 두 간판선수를 삼성에 현금 20억에 트레이드 한다.

레이더스는 그야말로 앙꼬없는 찐빵신세가 되었고, 99시즌 다시 꼴지로 복귀하였고 결국 팀이 해산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레이더스 역사속으로


97년 10월 16일 (주)쌍방울 개발의 최종부도를 시작으로 같은 달 26일에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최종부도를 맞이한다. 이 후 간단선수들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레이더스는 99년 7월 16일 이의철 구단주가 박용호 KBO총재와의 비밀회담에서 최초로 매각의사를 밝힌다. 물론 전부터 팀매각 협상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쌍방울관계자의 팀 매각의사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매각협상은 지지부진해서 진전이 없었고, 결국 99년 11월 16일 쌍방울 레이더스 김종철 신임구단주는 박용호 KBO총재와의 회담에서 2000시즌 팀을 꾸려나갈 능력이 없다고 최초로 밝힌다.
이때 프로야구단에 관심을 보인 SK그룹은 쌍방울과의 협상은 철저히 배제하고 KBO하고만 접촉하면서 레이더스 구단의 인수가 아닌 새로운 구단의 창단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 계획을 갖는다.

법정관리 중인 쌍방울 입장에서는 야구단을 넘기는 조건으로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아내야 하지만 SK는 반대입장이었다. 며칠 후면 자동적으로 퇴출되는 쌍방울과 만날 이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만약 쌍방울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쌍방울이 자동으로 퇴출되는 2월 12일까지 기다렸다 새로운 팀창단의 수순을 밟는 다는 것이 SK의 생각이었다.

한편 쌍방울 구단은 2000년 1월 23일부터는 선수들에게 식사도 제공하지 못했다. 아직 남은 선수들의 1월 연봉도 지급되지 못할 형편이었다. 선수들은 훈련이 끝나고 샤워조차 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야했다. 매각당사자들은 버티기만 했다.
결국 쌍방울은 얼마못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SK가 프로야구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 후 쌍방울은 퇴출되었고 SK는 새로운 구단을 창단했다. 결국 쌍방울 레이더스는 9년간의 짧은 흔적을 남긴채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SK는 레이더스의 인수가 아닌 새로운 팀의 창단으로 레이더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레이더스 소속 선수들은 전원 웨이버로 공시됐고, SK는 자유계약선수 영입의 형태로 레이더스 소속 선수들을 새로운 창단팀으로 영입했다.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김성근 감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96, 97시즌. 두 시즌 동안 보여준 '공포의 외인구단' 쌍방울 레이더스의 투혼은 영원히 야구팬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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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명부

출신교 : 돋도리이시고

활동 : 요미우리 - 73난카이 - 73히로시마 - 77히로시마, 83삼미 - 85청보 - 86빙그레
 
포지션 : 투수, 우투우타

별명 : 너구리
 
우리나라 역사상 한투수가 이토록 완벽하게 리그를 지배한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장명부'. 선동렬,최동원의 전성기엔 상대는 그 날만 포기하면 됐지만, 장명부는 완봉승을 거두고도 다음날 또 던졌다. 실로 그는 초인 아니 마인이었다.
 

◀ 히로시마 카프 시절
 
1968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에 연습생으로 입단해 난카이(73년), 히로시마(77년)에서 선수생활을 한 그는 82년 3승11패의 성적을 마지막으로 은퇴의 길을 택한다. 말 그대로 한물 간 투수였던 것이다.
82년을 참담하게 보낸뒤 삼미 슈퍼스타즈는 새로운 전력을 보강하여 83시즌을 맞는다.
일본에서 82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장명부는 삼미의 끈질긴 구애에 못이겨 한국행을 결심한다.
 
삼미는 천문학적 액수인 4000만엔 (1억2천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그를 영입했는데 당시 국내 최고 연봉선수였던 박철순의 연봉은 2천4백만원이었으니 얼마나 큰 돈인가. 게다가 주택까지 제공 되었다.
그만큼 그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 입단식

 
장명부의 입단과정도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그의 한국행이 결정되자 삼미는 기뻐서 신문에 대서특필을하기 시작하는데 오래간만에 비보가 아닌 주제로 신문에 삼미의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
 
한국에 가기로하고 난후 계약날짜가 남아 있자 장명부는 당시 일본에서 전훈중이던 삼성의 스프링캠프를 찾아가 배팅볼투수를 자청하며 삼성타자들을 상대로 배팅볼을 던져 준다. 이에 삼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삼미에게는 "나 아직 계약 안했는데"라며 응수해 삼미를 더욱 긴장시킨다. 하지만 장명부는 배팅볼을 던져주며 이만수,장효조등 국내 최고 삼성의 막강타선을 분석했던 것이다.
 
그래서, 타격의 달인 장효조도 전기리그에 서 그를 상대로 15타수 1안타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20승은 기본, 30승이 목표"

 

입단 기자회견에서 장명부는 "20승은 기본,30승이 목표다.20승도 못하면 유니폼을 벗겠다"고 말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다.삼미의 허영 사장과 KBO 이호언 사무차장은 장명부의 승수를 놓고 30승은 힘들고 박철순의 24승 정도를 예상했다.
이를 들은 장명부는 허영사장에게 만약 30승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본다.
이에 허사장은 어짜피 30승은 불가능 할꺼란 생각에 농담조로, "30승을 하면 1억원을 보너스로 주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농담조로 말한 허사장의 약속을 장명부는 가슴속 깊이 세긴다. (뒷날 이약속은 큰 문제를 일으킨다.)
한국에 와서 구단에 상대팀 타자들의 자료를 요구 했지만, 그당시 국내엔 그런 자료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자료를 만들기로 하고 감독에게 시범경기에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경기에 출전시켜달라고 한다.
 
그리곤 시범경기에서 직구로만 승부하며 타자들의 장단점을 파악해 자신만의 자료를 만들어 나간다.
시범 경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상대팀은 '장명부 별거 아니네'하며 방심한다.
이런 주도면밀한 계획이 있었기에 불멸의 30승은 가능했던 것이다.
 
 
◆삼미의 돌풍 주역 "장명부"
 
시즌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꼴찌팀 삼미의 돌풍! 그 한가운데는 장명부가 있었다. 우리나라 야구 역사상 한투수가 이토록 완벽하게 리그를 지배한적은 없었다.
 
선동렬,최동원의 전성기 때는 상대팀이 그들이 나오는 게임만 포기하고 다음 게임을 노리면 됐지만 장명부는 아니었다. 완봉승을 하고도 다음날 또 던졌다. 순위 경쟁이 한창이던 8월에는 나흘 연속 등판해 완투승, 2이닝 마무리, 2.1이닝 마무리, 완투승이라는 엽기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00게임중 60게임에 등판해 30승16패6세이브를 기록했는데 몇이닝이나 던졌을까? 요즘은 투수가 200 이닝을 던지면대단한 투수로 인정을 받는데 그의 투구이닝은 자그마치 427.1/3이닝이었다. 정말 철완이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등판한 이유는 바로 돈 때문,
 
시즌전 허영사장과 약속한 30승=1억 이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00게임에 정상적으로 출전해선 30승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곤 감독을 졸라 선발 중간 가리지 않고 등판해 목표인 30승을 이뤄내고 만다.
 
*여기서 잠깐 - 당시 삼미의 투수였던 분을 만난적이 있는데 당시의 장명부는 팀이 이기고 있는 게임에 구원등판해서 일부러 실점을 허용해 동점을 만들어 준 뒤 그때부터 전력투구를 해 선발투수의 승리를 가로채기도 했다고 한다. 30승 아니 1억원을 위해... 
 

그의 엽기적인 시즌 기록을 정리해보자.
 
*시즌 최다승-30승 *시즌 최다 선발-44게임 *최다 완투-36
* 최다 완투승26(5완봉승) *최다 선발승-28
*최다 투구이닝-427 1/3 *최다 타자-1,712 *최다 타수-1,559
*최다 연속게임 완투승-8 *월간 최다승-9승(5월)
*최단기간 20승-115일(34게임) *최다이닝 완봉승-12이닝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한국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작성한 그는 올스타전에 팬투표로 뽑혔고 골든글러브 투수부분을 당연히 수상했다.

선발로 나가면 완투. 마무리로 나가면 세이브로 보통땐 슬슬 던지다 위기땐 전력 피칭으로 삼진을 잡아냈다.
당시 국내 타자들에겐 생소한 사이드암 투수인데다 145km의 빠른 직구와 낙차큰 커브, 스크류볼등 변화구의 완벽한 제구력과 능수능란한 완급조절 ,수읽기,틈틈이 던지는 위협구등 기존 국내 투수들관 비교도 안되는 무시무시한 투수였다.
 


지금도 '장명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빈볼' 항상 빙글빙글 웃는 포커페이스인데다 상황에 따라 타자의 머리통을 향해 거리낌 없이 빈볼을 던지고 나서 놀란 타자를 바라보며 아무렇치도 않게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마치 '너구리'같아 '너구리'란 별명을 갖게 되었는데 그 결과 집단 난투극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 관중들에게 야구의 또다른 재미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장명부에게 인천팬들은 '너구리'라면을 BOX채로 선물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 빈볼도 그는 아무때나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막상막하의 경기서 상대팀이 대타를 자주 기용해 엔트리 대부분이 출장했을 때 빈볼을 던져 상대팀에서 빈볼을 맞아 부상당한 선수대신 대타로 내보낼 선수가 없게 되거나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 경우를 노린 것이다. 모두가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처음가보는 구장에선 항상 공 세개를  홈플레이트에서 1루,3루,마운드 쪽으로 살짝 굴려보았다. 번트나 빚만은 타구가 나왔을 때 어떻게 타구가 흐르는지를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경기중엔 타자도 타자지만 다음 타자가 뒤에서 스윙연습 하는 것을 살펴봤다. 보통 자기가 좋아하는 코스로 스윙하기 때문에 거기로 안던지기 위함이었다. 타자도 보지만 다음타자까지도 봤다는 얘기다.
 
이번엔 그가 어떻게 무지막지한 연투가 가능했는지 그의 말을 들어보자. "1번부터 9번까지 9명의 타자가 공격에 나서지만 타자의 역량은 모두 같지 않다.
 
1번은 빠른 타자고 3번은 잘치는 타자, 4번은 힘있는 타자다. 7,8번은 그팀에서 가장 타격이 약한 선수들이다.
 
내가 많은 횟수를 던지고 연투할 수 있는 것은 힘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3~5번 정도의 타자와는 전력승부를 하지만 하위타자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9회를 완투해도 조심해서 상대하는 경우는 10번 미만이다"
 
   
장명부는 너구리답게 연봉협상의 귀재였다
 

어쨌거나 이런 장명부의 활약으로 삼미는 좋은 성적을 냈지만 악재가 겹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하고 만다.
다음 시즌인 84년 역시 그의 어깨에 삼미의 운명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83년 30승을 올릴 경우 1억원의 보너스를 지급 하겠다던 혀영사장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당초 농담으로 했던 말이 현실로 다가오자 허사장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1억원 보너스약속은 정식 문서에 의해 작성된 옵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단 운영비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하지만 장명부는 허사장에게 집요하게 돈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허사장은 그 금액의 일부를 주고 장명부를 달래야 했다.그돈은 허사장의 사비였다고 한다.이에 회의를 느낀 장명부는 "한국 야구가 아무리 너절하기로서니 사장까지 실언을 하느냐.모두가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했다.
 
장명부는 구단과 한국야구계를 비난하며 태업을 벌였고 전년도 무리한 탓에 성적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13승 20패 7세이브 방어율3.30으로 성적은 악화되었다.
또한, 투수코치를 겸한 장명부는 팀내 라이벌인 임호균을 롯데로 트레이드 하고 박정후,정성만,신태중 등을 받아 들여 키우려고 했지만 이들 셋이 거둔 승수는 14승27패에 불과했다. 결국 팀은 다시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시즌뒤 삼미와 장명부는 지리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지난해 성적의 반에도 못미치는 성적을 올린 장명부는 시즌전 연봉계약시 약속한 벌금과 구단의 연봉삭감 방침에 맞선다.
선수분 3천만엔(약1억5백50만원),코치분 3천만원을 합친 1억3천5백50만원을 받았던 장명부는  20승을 못올릴 경우 1만달러(약8백만원)의 벌금을 내기로 한것이다.
장명부는 벌금은 내겠지만 연봉 삭감에 대해선 강력히 거부한다.
 

◀ 사진 제목 '참담한 장명부'
 
당시 김진영 감독도 팀이 꼴찌를 한 책임을 지고 연봉에서 500만원을 감액하기로 했는데 장명부는 워낙 연봉이 많았기 때문에 구단은 훨씬 만은 금액을 삭감하려한 것이다. (김진영 감독의 연봉은 2천4백만원)
 
이 과정에서 구단과 장명부는 감정이 상해 구단에선 그를 보류선수로 묶겠다고 한다. 이에 장명부는 법적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버틴 것이다. 결국은 2,800만원이나 삭감된 1억7백 50만원에 계약을 하고 만다. 이번엔 구단이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장명부는 삼미라는 구단에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85년에도 장명부는 고단수의 연봉협상 끝에 전년대비 28%인상된 3천2백만엔(1억1천8백만원)을 받는 대신 시즌 성적이 14승 이하일 경우 위약금 4천만원, 15~19승일 때 위약금 1천6백만원을 구단에 납부하고 20~24승일 땐 보너스 1천6백만원, 30승 이상일 땐 보너스 6천만원 추가의 옵션계약을 맺었다. 또 2세이브는 1승으로 치기로 했다.

이렇게 계약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동계훈련을 하지 않아 구위가 현저히 떨어지고 말았다.
 
오로지 장명부만 믿고 있었던 삼미는 장명부의 부진으로 팀이 뒤죽박죽 돼 '1인 의존'의 피해를 절실히 당하고 만다. 상대팀들은 이런 삼미의 사정을 알고는 삼미에 지는 것은 수치라고 여기며 전력을 다해 철저히 삼미를 짓밟았다.
 
85시즌 중 팀은 청보로 넘어갔는데 시즌이 끝나자 청보는 폐품이 되어 버린 장명부의 처리문제로 고심하게 된다. 시즌전 연봉 협상에서 합의한 옵션에 성적이 못미친 것이다. 11승 25패 5세이브로 2세이브를 1승으로 쳤을 때 13.5승이 돼 장명부는 구단에 4천만원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이에 청보는 장명부에게 엄청나게 삭감된 86연봉을 제시해 장명부가 이를 거부하자 11월22일 미련없이 자유계약 선수로 풀어 버린다. 결국 장명부는 86년엔 인천을 떠나 대전 빙그레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하지만, 이미 퇴물이 된 그는 86년 빙그레에서 1승 18패로 최악의 성적을 냈다. 이에 빙그레에선 연봉 전액(7천5백만원)을 반환하라고 요구했지만 이미 그에겐 반액도 반환할 능력이 없었다. 지난 4년간 5억 9천만원이 넘는 돈을 한국에서 벌었지만 씀씀이가 너무 큰 탓에 빈털털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사기를 당하고 빚보증까지 서 결국 월세 20만원짜리 하숙집을 전전하는 신세까지 되어 버렸다.
 
빙그레에서 쫒겨난 그를 삼성의 박영길감독이 코치로 쓰려했으나 그의 나쁜 이미지 때문에 구단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다.
 
이후 서울의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투수를 지도하다가 88년 인스트럭터 자격으로 삼성의 투수들을 지도했지만 연봉문제로 끝을 내고 롯데 투수코치를 맞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91년 5월 마약상습복용으로 구속되며 쓸쓸히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직도 사람들은 삼미 슈퍼스타즈를 말하면 '너구리 장명부'를 떠올린다.
그만큼 당시 그의 활약은 프로야구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의 활약은 한국의 프로야구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주었다.

83년 그가 거둔 시즌 30승은 아직까지 원년 박철순의 22연승, 백인천의 4할타율과 함께 한국프로야구 불멸의 3대기록으로 남아있다.
 
◆1983년 장명부 성적

60경기 30승 16패 6세이브, 방어율 2.34,  427.1이닝, 388안타, 122사사구, 220탈삼진
 
 

 
롯데 자이언츠 장명부 선수가 머리를 단정하게 깎고 오자 권두조 선수가 우스갯조로
"형님, 새장가가도 되겠수'라고 장난치자, 파안대소하는 장명부의 표정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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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마일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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