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제가 2002년 한일월드컵이 시작되기 며칠전에 야후코리아 스포츠 축구게시판에 8부작으로 올렸던 글입니다.

당시 이글은 히딩크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큰 화제를 불러모으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퍼가서 9년이 지난 지금도 히딩크 감독이 바꾼 한국축구 로 검색해보면 똑같은 글이 각 인터넷 사이트마다 무수히 뜨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주인을 찾아 이곳에 보관해 놓고자 합니다.



히딩크 감독이 바꾼 한국축구

현재 한국축구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 아니 경악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독일언론기자는 독일축구보다 훌륭하다고 평가하고 있고, 폴란드 기자는 폴란드가
한국에 대패할 것 같다고 우려하고 있다.

심지어 외국언론기자나 감독,선수들중에 월드컵에서 한국을 빅4로 뽑기까지하는 어
처구니 없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 단시일내에 이렇게 한국축구가 급성장하게 된것일까?

한국축구가 급성장하게 된 원인을 차근차근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 글을 다 읽는 순간 당신은 한국축구의 놀라운 발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 냉철한 분석

우리한국 전문가나 감독,선수,팬들 모두 한국축구는 정신력이 강하지만 개인기가 없
다고 평가하고 있다.

한마디로 체력과 정신력을 앞세운 무대포 축구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히딩크감독은 작년말에 한국축구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분석자료를 발표했는데 그
자료는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한국 선수들의 개인기에 85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준 반면 정신력 부분에서는 낙제점을 준 것이였다.

우리 한국인들이 보는 시각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히딩크감독이 한국에 와서 선수들에게 놀란 부분중에 하나가 양발을 다 잘 쓴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유럽선수들을 봐도 한쪽 발 밖에 못쓰는데 반해 한국선수들은 대부분이 양발을 능숙하게 쓰는것에 대해 히딩크감독은 놀랐다.

외국 축구관계자들이 한국의 12-13세정도의 유소년들을 보고 놀란다고 한다.
어린 선수들의 개인기가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축구에 대한 자질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주입식 교육과 훈련, 성적지상주의에 파묻혀서 정신력
과 체력만을 앞세울수 밖에 없게 되고 개인기는 무시되고 마는 것이다.

바로 히딩크감독은 이런점을 냉철하게 분석해 장점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동안 전혀 볼수 없었던 한국축구의 개인기,테크닉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선수들 개인기가 얼마나 일취월장했는지 최근 몇경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전에서 안정환선수의 첫번째 골을 보면 왼발로 슛을 쏘려다 제끼고 오른발로 슛
을 쏴 멋진 골을 성공시켰다.

안정환선수의 슛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왼발 오른발을 가리지 않는다.

어느 방향 어느 자리에서도 슛찬스가 나면 어느발이든지 능히 가공할만한 슛을 터트릴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스코틀랜드전에서 2번째로 터트린 골키파 키를 넘기는 로빙슛은 그동안 한국
축구에서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슛이었다.

안정환선수 개인기가 뛰어난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히딩크감독을 만나면서
야 비로서 빛을 보고 있는것이다.

안정환선수 뿐만이 아니다.
이영표선수가 프랑스전과 잉글랜드전에서 세계적인 선수들을 앞에두고 현란한 발동작으로 상대선수들을 속이는 모습을 기억하는가.

이천수선수가 스코틀랜드전에서 수비수와 골키퍼까지 재끼면서 선취골을 넣은 장면
을 기억하는가.

박지성선수가 세계적인 수비수인 드사이와 튀랑을 제끼고 바르테즈 골키파도 손도
못쓸 멋진 골을 넣은 것을 기억하는가.

현재 거의 모든 한국선수들의 개인기를 보라.
세계적인 선수들앞에서도 우수한 개인기와 정확한 패스를 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왜 이런 모습이 이제서야 나타난 것인가.

바로 답답한 한국축구의 현실이 이렇게 만든 것이다.

히딩크감독이 오지 않았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모습들이다.


2. 냉철한 분석 (정신력)

그리고 히딩크 감독은 정신력부분을 단순히 하나로 보지 않고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
평가했다. 예전 한국축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였다.

정신력을 정신력(한국인이 강조하는),동기부여,의사소통,위기관리능력등으로 세분하
고 평가했는데, 정신력과 동기부여부분에서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99점과 100점)를 주었으나, 위기관리능력과 의사소통 부분에서는 30점과 20점이라는 낙제점에도 못미치는 형편없는 점수를 주었고,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히딩크감독이 한국에 와서 놀란점중 또 한가지가 바로 선후배사이의 엄격한 서열과
선수들이 공만 잡으면 흥분한다는 사실이었다.

히딩크감독이 평하기를 한국선수들이 고참과 중간, 신참으로 나누어져서 고참과 신
참사이에 대화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나이어린 선수들이 자기보다 10살이상 많은 고참선수들에게 어려워하고 말조차 건내지 못하는 것이 엄연한 한국축구의 현실인 것이다.

선수들간의 대화가 단절된 상태에서 팀웍이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한 히딩크감독은
전면적인 수술을 했다.

식사를 할때도 고참과 신참이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게 했고, 방도 고참과 신참이
같이 쓰도록 고려했다. 연습때도 선수들간에 형같은 호칭을 빼고 이름만 부르게 한다는것은 이미 언론보도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현재 선후배간에 대화가 이뤄지고 있고 친해지며
선수들간에 서로를 믿고 신뢰하게 되었다.

찬물이 흐르는 살벌한 분위기가 아니라 연습때도 선수들간에 웃음꽃이 피고 화기애
애해졌으며 팀분위기가 좋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 자기보다 남을 위하고 팀을 위한 플레이가 나오고 있다.

최근 평가전에서 황선홍선수가 공을 빼았기면 김남일이 뺐고, 김남일이 못뺐으면 유
상철이 나서고, 유상철이 제껴지면 송종국이 나서고, 송종국도 안되면 홍명보가 나서고 홍명보마저 뚫린 위급한 상황에서 이영표선수가 몸을 던져 막아내는 모습을 볼수 있다.

서로를 신뢰하고 믿고 있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플레이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선후배간에 끈끈한 연대감이 생긴 것이다. 선수들이 예전처럼 무턱대고 뛰는것이 아니라 즐거움을 가지고 확실한 동기유발이된 상태에서 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수들이 공만 잡으면 흥분하는 것에 대해서도 히딩크감독은 냉철히 분석하
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항상 선수들에게 냉정해질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생각하는 축구를 하라며 쉴새없이
선수들에게 말하고 있다. 연습이나 경기때 조금이라도 생각없이 뛰는 선수가 보이면 크게 호통을 치며 지적하고 있다.

그 결과 선수들 자신도 팀이 변해가고 있으며 생각하는 축구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
고 있다.

최근 평가전 경기들을 보라.
한국선수들이 냉정침착해지고 영리한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상대방 골대앞에서도 아주 냉정해져서 골을 잡아도 예전처럼 홈런볼을 날리지 않고 낮게 깔
는 아주 지능적인 슈팅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축구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놀라운 발전인 것이다.

공만 잡으면 흥분해서 삽질만 하고 홈런볼만 날리던 한국축구가 히딩크감독을 만나면서 냉정
해지고 생각하는 축구를 펼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골결정력도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3. 카리스마

그동안 히딩크감독이 이끄는 월드컵대표팀이 성적이 않좋을 경우 언론은 심하게 흔
들에 댔다.

한국에 있는 모든 언론들이 히딩크호 침몰이라든지 이대론 안된다, 이제 선수들 테
스트는 그만하고 하루빨리 엔트리를 짜라, 골든컵에서 경기전날까지 체력강화훈련을하자 경기나 잘 하지 무슨 체력훈련이냐는등 거쎈 비판의 칼날을 들이댔다.

히딩크감독의 경질설까지 나올 정도로 여론이 악화됐다.
그러나 히딩크감독은 그때마다 모든 초점은 월드컵에 맞춰져 있다고 말하고 한경기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히딩크감독은 올 5월이면 세계를 깜짝놀라게 만들겠다고 말했으며, 체력훈련이 중요하다
고 강조했다.

그런데 지금의 결과를 보라.

히딩크감독의 예상대로 세계인들이 한국축구의 눈부신 발전에 놀라고 있다.
아니 경
악하고 있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간의 비판속에서도 꾸준이 계속해온 파워트레이닝 덕분으로 90분간을 쉼없이 뛰어
도 지치지 않는 한국축구를 보라.

후반만 가면 체력저하로 무너지는 한국축구가 이렇게 발전하다니 놀랍지 않은가.

이와같은 일은 히딩크감독이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희일비하지않고 소신을 가

지고 해왔기에 가능한 것이다.

외국감독이여서 가능한 일이지 한국감독이였다면 그날그날 성적내기 급급해 이런 장

기적인 안목을 가진 훈련을 해올 수가 없다.

아니 외국감독이라도 히딩크감독처럼 세계적인 명감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였

다고 하는것이 맞을 것이다.

한때 한국팀의 성적이 않좋을 때 한국언론이 흔들어대자 외국축구관계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히딩크감독은 손가락으로도 뽑을만큼 세계적인 명장인데 히딩크감독을 못믿는다면 누굴 믿겠느냐는 것이었다.

한국축구가 발전을 못하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바로 속칭 냄비정신이다.
경기결과만 놓고 비판해대길 좋아하는 우리 언론과 팬들의 수준이 한국축구의 발전에 가장 커다란 장벽이였던 것이다.

현재 언론과 팬들이 언제그랬냐는듯이 히딩크감독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참 웃긴 나라이지 않은가.
우리나라가 축구는 물론 정치,경제,문화등 많은 부분에서 선진국에 이르지 못하는 커다란 부분중 하나가 바로 언론이다.

바로 판매부수에 급급해 한번 터트리고 보자는 무책임한 언론들이 한국을 좀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히딩크감독이 있는한 한국축구는 무책임한 언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본다.

히딩크감독은 경기에 졌을때도 선수들 핑계를 댄적이 없다.
항상 매경기 인터뷰마다 한국축구팀은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그동안 했던 말들 하나하나가 이제서야 옳았다는것을 한국언론과 한국인들은 깨닫고 있다.

히딩크감독의 카리스마 덕분에 선수들은 언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고,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히딩크감독의 카리스마는 엄격한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속에 있다.
선수들에게 자유로운 플레이를 마음껏 펼치게 하고 연습할때도 항상 선수들과 어울려 장난도 쳐가며 축구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훈련이 아니라 즐겁게 논다는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선수들이 웃음을 잃지 않고 충실히잘 소화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서야 선수들이 축구를 즐기며 생각하는 플레이가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4.전술 (다양한 포메이션)

최근 평가전에 나타난 한국축구를 보면 포메이션 변화가 자유자재로 이뤄지고 있다.

한국축구의 전형적인 포메이션인 3-5-2에서 4-3-3, 4-4-2에서 심지어 3-4-1-2까지 포메이션 변화가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다. 정말 예전한국축구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발전이다.

히딩크감독은 언론기자들이 포메이션이 3-5-2냐 4-3-3이냐는등의 질문을 해올때마다 그것
은 단순한 숫자놀음일뿐이라며 일축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왔다.

그동안 한국축구가 포메이션에 국한되 창조적인 플레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언론
기자들의 질문수준도 그 정도밖에 안되는것이 서글픈 한국축구의 현실인 것이다.

선수들을 보면 고정된 포메이션이 없을 정도이다.
이영표, 최태욱, 이천수, 김남일, 박지성같은 선수들이 전후좌우를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좌측에서 센터링하던 이천수선수가 잠시후에는 우측에서 센터링을 하는 모습을 심심
치 않게 보게 된 것이다.

최전방 공격을 하던 이영표선수가 어느순간 최후방 수비를 맡기도 하고, 최후방수비를
맡던 홍명보가 어느순간 치고 올라와 공격진에 가담해 가공할만한 중거리슛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유자제로 포메이션이 바뀌는 플레이 덕분에 상대수비진형은 혼란을 일으키고
흐트러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폴란드를 비롯한 외국팀 관계자들이 이영표나 최태욱같은 선수들때문에 어리둥절하
다고 말하고 있다. 도대체 왼쪽공격수인지 오른쪽 공격수인지 미드필더인지 수비수인지 분간이 안간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팀에는 이런 전천후 만능플레이어들이 한둘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이영표,최태욱,이천수,김남일,박지성은 물론 유상철, 홍명보, 이을용
, 최성용등 대부분의 선수들의 전술소화능력이 일취월장했으며, 전전후 만능플레이어가 된 것이다.

현재 한국축구팀이 구사하고 있는 여러 포메이션중에서 간혹 나오는 3-4-1-2란 포메
이션은 전세계에서 빗장수비로 유명한 이탈리아밖에 구사하지 못하는 전술이다.

전형적인 수비 포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월드컵에서 포르투칼같은 강팀을 상대
할 때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 생각된다.

경기진행에 맞춰 자유자재로 포메이션이 변화하고 선수들이 동에번쩍 서에번쩍하면
서 전천후로 뛰고 있는것을 보면 놀랍지 않은가.

히딩크감독이 한국축구의 수준을 이렇게 놀랍도록 향상시킨 것이다.

네티즌이 만든 대한민국 거스 히딩크감독 주민등록증


5.수비

히딩크감독이 들어오면서 손을 댄 곳은 수비이다.

어렵게 골을 넣으면 손쉽고 어처구니없이 골을 내주던것이 고질적인 한국축구의 병
폐였다. 이 점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일 것이다.

히딩크감독은 한국축구에서 사용하고 있는 맨투맨수비와 홍명보가 맡고 있던 스위퍼
시스템을 과감히 폐지했다.

한국수비의 전형적인 포메이션인 쓰리백도 선진축구시스템인 포백으로 바꾸었다가
선수들이 적응을 못하자 쓰리백으로 전향하긴 했지만, 이제는 포백시스템에 대한 한국선수들의 적응력도 어느정도 일정 수준에 오른 듯하다.

히딩크감독은 현재 쓰리백을 쓰고 있긴 하지만 포백은 한국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매번 강조하고 있다.

그럼 한국축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자.

바뀐점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여겨볼 점은 선수들이 협력수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격수는 공격만하고 수비수는 수비만 하는것이라는 한국인들과 선수들의 고정관점

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공격수도 공이 상대방으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수비수로 전환해야 한다고 매번 강조하고 있고 선수들도 이에 적응하고 있다.

최근 평가전을 보면 한 선수가 뚫려도 곧바로 다른 선수들이 수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비가 그물망처럼 아주 탄탄해진 것이다.

또하나는 압박축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비를 수비진에서 하는것이 아니라 미드필더진형부터 철저하게 압박하며 수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처럼 공격진은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고 수비수들이 태클로 급급히 수비하던 한
국축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공격진도 공을 빼앗기는 순간 수비수로 전환해서 상대방 공을 뺐는 모습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미드필더진형부터 상대방을 강하게 압박해 들어가니 상대방은 당황해 우왕자왕하고
공격도 제대로 못해보고 공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는 지역방어 수비를 뽑을 수 있다.
예전 한국축구를 보면 상대방에 조금 잘하는 선수가 있다 싶으면 전담 마크맨을 붙이는 수준낮은 축구를 해왔던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선수만을 쫓아다니는 맨투맨수비 일색이였다.

그러나 히딩크감독이 들어서면서부터 맨투맨수비는 사라지고 지형방어 시스템으로
완벽하게 바꿔있다. 물론 처음에는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선수들로 인해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지만 지금은 얼마전까지만해도 A매치 무실점기록등을 세울정도로 수비가 놀랍도록 안정되었고 일취월장했다.

더구나 한국축구의 발목을 잡던 스위퍼시스템도 사라졌다.
홍명보가 자리잡고있던 스위퍼시스템은 불안한 한국수비 때문에 그동안 어쩔수없이 선택했어야 했지만 히딩크감독은 과감히 없앴으며 위에 열거한 수비에서의 많은 변화와 발전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스위퍼시스템이 사라진 대신 일자수비가 들어섰다.
강력한 압박과 협력수비, 지역방어와 일자수비가 히딩크감독이 만들어낸 작품인 것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빗장수비와 비교해봐도 전혀 손색없는 한국축
구의 수비를 주시하라.

상대팀은 미드필더진형부터의 강력한 압박에 공격도 제대로 못해보고 허둥대다 공을 빼앗
길 것이고, 전세계인은 한국의 강력한 압박수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6.강력한 체력과 빠른 스피드

현재 외국언론과 축구관계자들이 한국축구대표팀을 평가할 때 90분간 지치지 않는
강력한 체력과 빠른 스피드를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다.

언론이 사정없이 흔들어낼 때 아랑곳 안하고 파워트레이닝을 한 효과가 이제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축구에서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중요한것이 체력이다.

한국축구도 예전부터 체력을 입이 닳도록 강조해왔지만 바보같이 뜀박질만 많이했지
체계적인 훈련은 전무했다. 축구가 마라톤도 아닌데 체력을 강조한다고 달리기만 해대니 공만 잡으면 허둥되고 삽질해대는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히딩크감독이 들어오면서 히딩크감독 외에 외국의 여러코치진들도 함께 들어왔다.
이들이 한국선수들을 아주 과학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분석해가며 훈련시키고 있다.

더구나 히딩크감독은 선수들에게 무턱대고 지긋지긋한 훈련만 강요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웃고 즐길 수 있는 훈련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선수들이 즐겁게 훈련을 하게 됨에 따라 훈련성취량이 대폭 향상 되었다. 한마디로 일의 능력이 향상된 것이다.

훈련내내 선수들과 감독, 코칭스태프간의 웃음이 그치질 않으니 몸은 고달퍼도 마음

이 편하니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어린 유소년들에게 축구를 즐기게 해야지 무턱대고 주입식으로 시키는한 한국축구의 발전은 요원한 일이다.

강력한 체력과 더불어 빠른 스피드는 한국축구의 커다란 장점이다.
히딩크감독은 한국선수들의 빠른 스피드에 가능성을 발전하고 이점을 극대화하고 있다.
히딩크감독은 상대방이 강하고 거칠게 나올수록 빠른 스피드로 돌파해 내겠다고 말하곤 했다.

근 평가전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전형적인 유럽식축구를 구사하며 거칠게 나왔
지만, 한국선수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유럽선수들보다 더 강한 체력과 빠른 스피드로 돌파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강력한 우승후보라는 세계최강의 팀과 선수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기량을 100%이
상 발휘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상대팀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후반을 주목하라.
90내내 상대방을 앞도하며 쉴새없이 몰아치는 한국선수들의 체력과 스피드앞에 상대선수들은 녹초가 되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것이다.


7.생각하는 축구

히딩크감독은 선수들에게 끈임없이 생각하라며 말한다.

외국언론들이 한국축구를 생각없이 뛰는 로봇축구라고 빗댈정도로 그동안 한국축구
는 생각하는 창조적인 플레이가 전무했다. 한국감독이 한국축구국가대표팀을 맡고 있는한 이 점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딩크감독은 선수들에게 축구를 즐기라고 말한다. 생
각하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수긍하고 넘어가지말고 왜?라는 궁금중을 가지고 질문하라고

말한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라고 말한다.

히딩크감독은 외국선수들에 비해 한국선수들이 매우 순진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히딩크감독은 한국축구의 매력과 장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외국스타급선수들은 감독의 말도 곧잘 무시하며 팀웍을 깨는 일도 종종 있지만, 한국
선수들은 감독말에 잘 따르고 애국심이 투철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높은 점을 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 점은 단점이
라며 이점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선수들간에 분위기가 좋아졌고 이에 더불어 팀웍이 급속도로 향상되었을 뿐
만아니라, 선수들이 생각하는 창조적인 플레이를 하고 있다.

볼을 잡아도 냉정침착함을 유지하고 있고, 팀이 이기기위해 자신이 해야할 역활을
잘 알고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선수들이 생각하는 축구를 하게 됨에따라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다양한 포메이션의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전력이 몰라보게 급상승한 것이다.

선수들이 냉정침착해지면서 수비도 안정되었고, 골결정력도 몰라보게 높아졌다.

최근 평가전에서 선수들의 슛팅을 보았는가.
유럽 최정상급의 선수들과 비교해봐도 전혀 손색없는 낮고 빠르고 정확한 슈팅들이 상대방 골네트를 흔들고 있다.

그리고 몇개의 슈팅과 골들은 무턱대고 강한 슛이 아닌 골기퍼를 살짝 재끼는 아주
영리하고 교묘한 골들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창조적인 한국축구를 이
번 월드컵에서 기대하라.

더이상 월드컵마다 뒤풀이되는 안타까운 홈런볼 대신 낮고 강력하고 재치있고 정확
한 골들을 구경할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다.


8.기타등등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이 히딩크감독이 탈바꿈 시킨 한국축구인 것이다.
98년 프랑스월드컵에 누구도 프랑스의 우승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조차 정상권급으로 평가되지 못했으며 우승후보로는 당시
세계최강이었던 브라질과 이탈리아,아르헨티나,독일,네덜란드,스페인등이 뽑힐뿐 프랑스가 결승에서 브라질을 3대0으로 대파하고 우승컵을 차지할거라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월드컵이 끝난후 세계축구관계자들은 부랴부랴 프랑스팀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랑스가 우승한 원인을 분석하며, 프랑스 우승은 감독(당시 에메 자케 감독
)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에메 자케 전 프랑스 감독이 그동안 세계축구계에서 변방이였던 프랑스축구를 세계최강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는 주위의 우려를 뒤업고 노장대신 과감하게 신인들을 대거 기용함으로써 이런 결
과를 이끌어 내었다.

히딩크감독 역시 선수선발에 있어서 예전에 선수들의 실력보다 명성에 치우쳤던것과는 달리 철저히 실력위주로 뽑고 있다. 이 결과 국가대표에서 절대 빠지지 않을것이라 생각되었던 홍명보와 김병지등 주축선수들이 거의 1년가까이 빠져있었다.

그리고 홍명보 황선홍 김병지등은 명성에 자만하지 않고 냉철하게 실력으로서 보여
줘야 했고, 한단계 성숙한 플레이로 히딩크호에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

그동안 알아주지 않았던 김남일이라던지 최진철, 이을용, 송종국선수와 차두리선수
까지 모두다 히딩크감독이 아니면 선발될 수 없었던 선수들이였다.

일부 비판이 있기도 했지만 과감히 기용해 출장시켜 경험을 쌓게 했고, 이 결과 뛰
어난 실력으로 인해 한국팀 전력을 배가시키는 일등공신들로 자리잡고 있다.

단기일내에 이런 선수들의 기량을 알아보고 키워낸 그의 안목은 역시 세계적인 명장
답다고 평가할만 하다.

더욱이 한국팀은 경험이 부족하다는것을 깨닫고 유럽의 강팀들과의 평가전을 끈임없
이 치르게 했고, 그 결과 유럽팀을 만나서도 전혀 뒤지지않고 오히려 앞서고 승리를 이끌어내며 한국축구의 유럽 컴플랙스를 완벽하게 떨쳐버렸다.

한경기경기마다 일희일비하는 한국축구의 현실에서 월드컵을 앞두고 자신보다 강한
유럽최정상팀들과의 평가전을 연이어 잡는 것은 히딩크감독만큼의 배짱과 소신이 없는한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축구가 단시일내에 이렇게 발전한것은 단순히 히딩크감독의 업적만은 아니다.

그동안 답답한 한국축구의 현실장벽앞에 가려져 있던 한국축구의 잠재력이 히딩크감
독을 만나면서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활짝 기지개를 켠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축구의 장단점을 아주 세밀하게 분석해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
을 거의 완벽하게 치유한 것이다.

히딩크감독의 말대로 5월들어 세계인들이 한국축구에 대해 놀라고 있다.

이탈리아를 능가하는 빗장수비와 네덜란드의 숨박히는 압박축구에 프랑스의 예술적
인 축구와 브라질의 개인기를 갖추고 전차군단 독일의 조직력에 비해 전혀 손색없는 한국축구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오바일까.

물론 아직도 한국축구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더욱 가다듬고 발전해야 할 부
분들이 많다. 그러나 최근평가전과 외국언론과 축구관계자들의 평가를 제외하더라도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은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한차원 틀린 진정한 한국축구를 선보일 것이고, 모든 이들은 놀랍도록 탈바꿈한 한국축구에 대해 감탄하게 될 것이다.

세계인들은 한국축구의 돌풍에 놀라게 될 것이고, 월드컵이 끝난후 이 모든것은 히딩크감독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높이 평가할 것이다.

세계최강인 프랑스와 잉글랜드를 상대로 해서도 경기를 지배할 정도로 놀랍게 탈바
꿈한 한국축구 아직도 믿기지 않는가.

이번 월드컵을 주목해보라.
세계인은 한국축구의 돌풍에 놀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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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Sammi Superstars)는 프로야구 원년에 출범했던 추억의 프로야구팀 중 하나이다.

삼미 슈퍼스타즈 구단 선정

1981년 프로 야구 출범 준비 과정중 6개로 나뉜 각 지역의 연고 구단 선정 원칙은 "재무구조가 튼튼한 대기업중 그 기업 총수의 출신도별로 연고지를 정한다" 였다.

경기도,강원도, 이북5도를 연고로 하는 인천팀의 연고 구단으로 제일 먼저 지목을 받은 기업은 현대였다.

정주영회장이 강원도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측은 정회장이 88올림픽을 유치한 직후여서 올림픽에 전념을 다 하겠다고 야구단 창단을 거부한다.

두 번째 기업은 한국 화장품이었다.당시 대한 야구협회장을 맡으며 실업팀을 운영하던 임광정회장은 연고지를 서울로 해줄 것과 기존 한국화장품 선수들을 그대고 유지시켜 줘야 한다고 우겨서 결국 실패..


세 번째 기업 대한항공은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으나, 유류파동으로 인한 회사의 적자를 이유로 결국 포기 하고 만다.

이때는 다른 지역의 연고 기업은 거의 확정 상태였는데, 충청도 지역을 맡기로 한 두산이 현대의 불참을 알고는 대전 대신 인천으로 연고로 옮기겠다고 요구를 한다. 하지만 대전 지역을 대신할 기업이 마땅치 않아 3년후에 서울로 연고지를 옮겨주기로 하고 대전지역을 두산에 맡긴다.

1982년 11월에는 인천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은 모두 구단 선정이 완료돼, 인천만 골치덩어리로 남게된다.
결국 준비 위원들은 11월 25일에 정식 모임을 갖기로 하고 만일 그때까지 인천지역을 맡을 기업이 나타나지 않으면 인천은 빼 버리기로 한다.

그런데, 인천 때문에 프로야구의 출범이 어려움을 겪는다고 소식이 나가자 삼미(三美)의 김현철 회장이란 사람이 준비위원에게 전화를 걸어와 인천 지역을 맡겠다고 한것이다.

그 시간은 25일 정식 모임 6시간전인 11시여서 더 극적인 것이였다.

준비 위원들도 처음엔 이름도 잘 들어 보지 못한 삼미 그룹이 참여 의사를 밝혀와 당황하기도 했다. 삼미는 서울에 있는 삼일 빌딩의 소유주로 삼미 철강,삼미 목재,삼미 해운등을 운영하는 기업이었다.


특히 인천에 자리잡고 있는 삼미해운으로 인해 인천에 연고가 있는 기업이기도 했다. 삼미는 대대적인 PR을 요구하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기업이 아니였으나 김현철 회장의 뜻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김회장은 경기중을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 대학에 재학중일 때 MLB야구에 심취하기도 한 인물로 당시 나이가 31살밖에 안되는 젊은 회장이었다. 오죽했으면 25일 정식모임에 찾아온 김회장을 아무도 못알아봤을까?

많은 사람들이 삼미가 인천을 자발적으로 맡고 나선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김현철 회장은 두산 박용곤 회장과 대학 선후배 사이로 두산이 인천을 맡으려다 밀리자, 김회장에게 이를 권유해 일이 성사 된 것이라 한다.이렇게 돼서 1981년 12월 11일 프로 야구 창립총회가 열려 프로야구의 출범을 알린다.

이렇게 인천 프로야구는 출발부터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작을 알렸다.

프로야구 개막식


삼미 슈퍼스타즈 구단 창단

1982년 2월 5일 인천 상공회의소 강단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창단식을 갖고 삼미호의 출항을 만방에 알린다. 삼미 슈퍼스타즈(Sammi Superstars) 원년 프로야구선수는 총 23명으로 인천, 경기도, 강원도 지역을 프랜차이즈로 창단했다.


마스코트는 악의 무리에게서 지구를 지키는 "슈퍼맨"

이 얼마나 대단 하고 웅대한가?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다른 팀과 달리 여자 마스코트도 있었다는 것.

바로 "원더 우먼" 일명 원더 빤스로도 불리곤 했다.

'슈퍼스타즈'란 팀명은 김현철 회장이 미국 유학시절 미식축구에 심취해 있었는데, 거
기에서 '슈퍼스타즈'란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창단 첫 해인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첫해에 5개팀들은 국가대표 선수급의 선수들이 각각있었으나, 단 한 팀 삼미슈퍼스타즈는 국가대표급 선수의 부족으로 인해 15승 65패, 승률 0.188이란 성적을 거두며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83년, 재일교포 장명부 투수가 삼미에 입단하여 단일시즌 30승을 올리는 활약과 더불어 새로 입단한 국가 대표 임호균, 김진우 및 정구선 등의 활약을 통해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모두 2위에까지 오르는 이변을 보였으나, 그당시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1위팀끼리 격돌하는 한국 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에이스 너구리 장명부투수의 의지에 따라 팀의 성적이 좌우되었는데, 이듬해 1984년에는 에이스 장명부의 부진과 전체적으로 팀의 부진으로 인해 38승 59패 3무를 기록, 꼴찌를 기록했으며, 이듬해 1985년에는 팀 최다 연패(18연패) 등의 기록을 세우며 최하위권을 맴돌게 되었다.


그럼 삼미의 원년 멤버들을 알아 보자.

*구단주: 김현철
*단장: 이혁근
*감독: 박현식
*코치: 이선덕.이춘근
*투수: 인호봉.이동주.박경호.김동철.이하룡.한상연.김재현.감사용.오문현
*포수: 금광옥.김진철.최영환
*내야수: 김구길.김경남.이철성.송경섭.조흥운.장정기.허운.이찬선.한인철.김무관
*외야수: 양승관.문주모.김호인.이경수.박준영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잘 알려져 있는 감사용도 눈에 뛴다.


삼미 슈퍼스타즈 매각

1985년 전기리그가 끝난 후 청보 그룹에 매각되어 후기리그부터 청보 핀토스가 되었다.

1985년 5월 1일 삼미는 청보 그룹에 팀 매각을 발표한다. 매각의 원인은 84년 6월부터 삼미그룹의 주력회사인 삼미 해운의 적자 누적등 경영난과 성적부진 때문이었다.

1차로 삼미 해운을 처리한 삼미그룹은 84년 그룹의 상징이었던 삼일빌딩을 상업은행에 290억에 매각한다. 이런 상황에서 82~84년 동안에 45억1천만원의 적자를 낸 야구단을 유지 할 수는 없었다.

많은 홍보를 필요로 하는 소비재 분야의 계열사가 전혀없는 삼미 그룹의 성격상 야구단이 창출하는 효과를 전혀 누리지 못한데다 85시즌 개막과 함께 이어진 연패에 넌덜머리가 나 매각을 서두르게 된다.

이때 세운 기록이 18연패로 불멸의 최다연패기록이 된다.

1984년말부터 김현철 회장은 원매자를 알아 본다. 럭키금성(현 LG).한국화약(현 한화).한국화장품.농심등 그동안 프로야구에 관심을 보인 구단에 의향을 타진 했으나, 70~80억원을 요구한 삼미에 반해 삼미의 어려운 사정을 아는 기업들은 40~50억원의 헐값을 요구해 계약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제7구단 창단권을 따낸뒤 가입금 30억원을 놓고 KBO와 실랑이를 벌이던 한국화약은 차라리 인천팀을 인수해 버리고 대전 지역 창단을 포기 할 것도 검토 했으나, 그 역시 가격차이를 좁히지 못해 실패.

청보로 낙찰 되기전 가장 근사치로 접근한 곳은 럭키금성이었다.4월 중순 까지만 해도 양측은 거의 합의점에 이르렀으나 럭키금성이 다시 감가상각비의 명목을 들어 4억원을 더 깍자고 제의해 삼미의 감정을 건드려 무산 됐다.

그러다 청보가 갑자기 등장한 것은 두기업 오너의 학연이 크게 작용했다. 청보 김정우회장과 삼미 김현철회장은 경기고 선후배 사이로 평소 가까이 지내다 김현철의 사정을 알고 선뜻 구단을 인수 하기로 한 것이다. 매각 조건은 70억원 이었으나 현금이 아니라 삼미의 부채를 청보가 떠 맡는 것 이었다.

매각 대금은 70억원으로 발표 됐으나 실제로는 60억원 이었다고 한다.
매각 협상을 끝 마치고 난 뒤 삼미의 김현철 회장은 하염없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얼마나 아쉬웠으면...

이렇게 삼미 슈퍼스타즈는 1982년 2월 5일 구단을 설립한지 1,233일만에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인천 두번째 프로야구팀 추억의 조랑말 청보 핀토스
인천 세번째 프로야구팀 추억의 태평양 돌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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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나 일본의 홈런왕 왕정치는 투수 출신 홈런왕으로 아직도 각 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타자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에도 투수 출신 홈런왕으로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강타자가 있었다.

바로 특유의 '오리 궁둥이' 타법으로 인기를 모았던 김성한이다.


프로야구 원년에 투수로 출전해서 10승을 거두기도 했던 김성한은 1982년부터 95년 은퇴할 때까지 14시즌 동안 207개의 홈런과 143개의 도루를 기록한 호타준족형 타자였다.

1980년대 이만수와 더불어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강타자였던 김성한은 전형적인 클러치 히터로 유독 큰 경기, 중요한 순간에 강한 면모를 과시하며, 해태 타이거즈가 7차례 우승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7번의 한국시리즈에서 기록한 최다 안타(30), 최다 2루타(8), 최다 홈런(4), 최다득점(23) 기록은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김성한은 88년 프로야구 최초로 30홈런을 쳐내며 30홈런 시대를 열었다.

그 다음해에는 26홈런, 32도루로 최초로 20홈런-20도루 클럽을 개설하며, 한국 프로야구사를 새롭게 썼다.
지금이야 홈런 40개도 별 어려움없이 걷어 올리지만, 당시 30홈런은 일대 혁명.

또 20-20이라는 새로운 신세계를 개척하며 현대 박재홍의 30-30의 디딤돌이 됐다.

이 밖에도 정규 시즌 MVP 2회(85, 88년), 올스타전 MVP(92년), 최다 홈런 3회(86, 88, 89년), 최다 타점 2회(82, 88년), 골든글러브 6회(85∼89년, 91년)를 수상했다.

김성한은 또 투수로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프로야구 원년인 82년, 10승 5패 1세이브 방어율 2.88의 수준급 피칭을 하고, 타자로 타율 3할5리, 10홈런, 69타점을 함께 기록한 만능플레이어로 프로야구판에 신선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이후 1986년도까지 마운드에 섰다.

김성한은 투수출신이여서 투수를 읽은 눈이 뛰어났다.

대부분의 투수들은 많은 런닝과 강도 높은 체력훈련 탓으로 허리와 하체가 야수들보다 강하며, 상대투수의 마음을 읽은게 다른 타자들보다 앞서기 마련이다.

3차례의 홈런왕과 최초로 한 시즌 30홈런을 돌파하며 프로야구에서 대성했지만, 한·미 대학선발팀에 나간 것이 대표팀 이력의 전부일 정도로 대기만성형 선수였다.

 그래서, 82년 프로에 입단할 때의 계약금, 연봉으로 1천2백만원씩 받았는데 2천만원을 넘게 받는 동료들이 바라보며, 입단 때 받았던 설움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의 오기와 집념은 대단했고 그것이 오늘의 김성한을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김성한은 군산 중앙초등하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 군산상고를 거치면서 군산야구의 대표적 인물로 우뚝서며,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등 역전의 명수란 신화를 낳은 선배들을 제치고 가장 화려한 프로야구 경력을 지닌 선수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김성한은 당시 상대팀 투수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던 해태의 KKK타선(김일권,김종모,김준환,김봉연,김무종 등)중에서도 핵심으로 맹활약한다.

해태 타이거즈 투타의 핵이였던 선동열과 김성한

대타자 김성한에게 가장 까다로운 투수는 누구였을까?

그는 서슴없이 최동원을 꼽는다. 선동열은 같은 팀이기 떄문에 상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동원처럼 변화구 낙차가 크고 스피도도 있으면 서 제구력과 두둑한 배짱을 지닌 투수도 없었던 것 같다고 평한다.

별명은 오리궁둥이이다. 이 별명은 그의 특이한 타격폼 때문에 붙은 별명인데, 김성한은 다른 타자들과 달리, 마치 일본도를 잡는 자세와 같이 배트를 뒤로 젖힌 상태로 공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칠 때의 엉덩이가 뒤로 빠지면서 뒤에서 볼 때 오리의 엉덩이와 흡사하여 붙여졌다.

그의 등록상표처럼된 오리궁둥이 타법은 대학교 3년때부터 시작되었다.

동국대학 시절 배성서 감독(전 빙그레감독)은 방망이가 처져서 나오니 아예 미리 처진 상태에서 공을 떄리는 주문을 했고, 그것을 김성한은 나름대로 잘 소화하여 된장 뚝배기 맛을 내는 독특한 자세를 완성시킨 것이다.

간혹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 가운데 김성한처럼 독특한 타격폼을 가진 선수들이 있는데, 그것은 빠른공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단축의 효과를 노리기 때문이다.
큰 엉덩이를 축으로 뽑아내는 그의 가공할만한 장타력은 안쪽 바깥쪽을 가리지 않고 공을 넘겼다.

1991년 한일 슈퍼게임때 일본의 내노라는 투수들을 처음 대하면서도 3개의 홈런을 좌우로 떄려낸 것은, 공을 몸 가까이 붙여 놓고 떄릴 수 있는 김성한 타법의 장점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맹활약으로 인해 그의 배트는 일본 야구 박물관에 헌액되었다.


김성한은 프로야구 원년부터 맹활약하며 타격 전분야에 걸쳐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다재다능함은 '오리 궁둥이'이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을 정도로 한곳으로 초점을 맞추지 못하게 한다.

다재 다능함으로 강렬한 이미지 형성에 손해를 본 김성한의 대표적인 사례 한가지.

프로야구 초창기, 지명타자로 나섰다가도 팀이 위기에 몰리면 마운드에 나섰던 그는 3루수는 물론 1루수까지 맡으며, 1982년 올스타전의 인기 투표에서 총득표 순위 3위를 마크했지만, 투수에서 2위, 지명타자에서도 2위, 3루수에서 4위 등으로 지명되어, 결국 감독 추천으로 서군의 투수로 지명되었다.

김성한의 이러한 '이미지 난'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부분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그가 14년간 소속되어있던 해태 타이거즈.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어버리는 Red & Black 유니폼을 입고 뛰던 당시 통산 7차례나 한국 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던 독특한 팀 컬러의 해태 타이거즈에 소속이었다는 점 역시 김성한 개인의 이미지 메이킹에 걸림돌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해태가 어떤 팀인가? 한국시리즈 9회 우승이란 대기록 앞에 감히 일개 개인의 영광이나 기록이 더 위대할 수 없었고, 당시 해태에는 수많은 슈퍼스타들이 즐비해서 김성한의 해태가 아닌 해태의 김성한일 뿐이였다.

만약 그가 다른 팀에 소속이었다면 1980년대를 풍미한 최고의 타자로 첫손가락에 뽑힐지도 모르지만, 김성한 본인도 그런 가정은 원치 않을 것이다.

우승의 영광을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을 게 분명한 김성한이기 때문이다.

김성한은 1995년에 14년간의 프로야구 생활을 뒤로하고 은퇴한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6년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코치수업을 받으면서부터 제 2의 야구인생을 펼치기 시작했다. 미래의 호랑이군단 사령탑으로 재탄생하기 위한 담금질이 스타트 된 것이다.

이후 김성한은 해태 코치로 97년부터 4년간을 보낸 뒤 김응용 감독의 바통을 이어받아 마침내 명문 해태구단의 감독 자리에 올랐다.

하위권에 맴돌던 팀을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2004년 시즌중반 성적부진에 의해 경질되었고, 2005년 현재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의 감독을 맡았으며, 최근에는 KBS 2TV에서 방송중인 천하무적 야구단에서 가끔 객원해설을 하기도 하였지만, 현재는 기술고문 겸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형적인 클러치 히터로 유독 큰 경기와 중요한 순간에 강한 면모를 과시하며, 해태 타이거즈 7번 우승의 주역이였던 김성한.

특유의 '오리 궁둥이'폼과 함께 프로야구가 배출한 최고의 타자중 한명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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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우리 결혼했어요(이하 우결)'에서 이장우 함은정이 새로운 커플로 출연한다는 소식에 인터넷이 후끈 달아올랐다.

우결에서 용서커플인 정용화 서현이 하차하고, 배우 이장우와 걸그룹 티아라 멤버인 함은정이 새로운 가상 부부로 합류하게 되었다.

함은정은 "황정음 언니같이 가상커플이 실제 커플이 되는 꿈을 꾸는 설레임으로 촬영에 임하겠다"며 "지금까지 우결에 출연했던 다른 출연자와 차별화된 재미 시청자들에게 선사하고 싶다"고 전했다.


이장우 함은정 커플의 첫 녹화는 같은날 오후에 진행됐으며 이장우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에 함은정의 가상 남편으로 모델 김영광과 배우 김수현이 언급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함은정의 가상 남편인 이장우는 현재 KBS 1TV 일일드라마 '웃어라 동해야'에 출연 중이고, 티아라 함은정은 인기리 종영된 KBS 드라마 '드림하이'에서 진국(옥택연)을 짝사랑하는 윤백희 역으로 뜨거운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박정아의 남자' 이장우와 '옥택연 짝사랑녀' 함은정의 출연에 대해 시청자들의 기대감은 급증하고 있다.

탤런트 이장우 미니홈피와 티아라 함은정 미니홈피 방명록에는 수많은 네티즌들이 새로운 커플탄생에 들뜬 기대감을 가지고 축하멘트를 수북히 쌓아놓았다.



미니홈피 방명록 곳곳에 배우 이장우 소녀팬들의 애교섞인 질투어린 덧글들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티아라 함은정 미니홈피 방명록에도 삼촌팬들과 티아라 팬들의 질투어린 덧글을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다.


탤런트 이장우 미니홈피 주소 : www.cyworld.com/17222019


티아라 함은정 미니홈피 주소 : www.cyworld.com/cong1212

 

 

티아라 함은정 각선미 사진이 절묘하다.
 


오랜만에 우결에서 탄생한 이장우 함은정 새커플이 어떤 알콩달콩한 사랑이야기를 꾸며갈지 온라인상에서는 이미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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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곤충들을 모아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큰 곤충 - 하늘소

타이탄하늘소 : 아마존 우림에 사는 하늘소과의 딱정벌레인데
몸길이는 15~20cm로, 몸무게까지 같이 따져보았을 때, 세계에서 가장 큰 딱정벌레로 꼽힙니다.

  
세상에서 가장큰 곤충 - 거미

새잡이거미 : 다리까지 전부 펼친 넓이가 30센치미터 정도 된다고 합니다.


낙타거미 : 낙타거미 역시 크기라면 엄청납니다. 이라크에서 촬영된 사진

 
세상에서 가장큰 곤충 - 나방

아틀라스산누에나방 : 날개편 길이가 대략 30센티정도 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큰 곤충 - 장수풍뎅이

코끼리 장수풍뎅이의 몸길이는 13센티로 곤충중에서 가장 무겁습니다.

 
세상에서 가장큰 곤충 - 꽃무지

아프리카에 사는 골리앗꽃무지(Goliathus goliatus)는 12.5~17.5센티 정도로 몸무게는 1백그램이나 됩니다.

몸무게로는 가장 무거운 곤충입니다.


세상에서 가장큰 곤충 - 모기

엄청나게 크군죠. 저 모기에 물리면??

 
마지막으로 지구상에 살았던 곤충중에서 세상에서 가장큰 곤충은 잠자리류입니다.

화석에 나타난 잠자리는 양쪽 날개를 합쳐 75㎝(매의 크기) 정도이며, 출현시기는 3억9천만년 전에서 2억8600만년 전사이 고생대 석탄기부터라고 합니다.

그 때의 모습은 현재와 같으며 크기만 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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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8년 전. 시골 한 조그만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습니다. 교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야구부원들의 훈련 모습이 너무 멋있어 야구부에 찾아갔습니다. 그 아이는 마냥 야구가 좋고 신기하기만 했습니다.그렇게 바로 제 야구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연습생에서 한국 최고의 타자로

1986년. 한국 프로야구에 ‘제7구단’ 빙그레가 창단하게 되었다.

장종훈은 1986년 세광고를 졸업하게 되었고 갈만한 대학팀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세광고감독이 빙그레 배성서 감독에게 부탁. 입단테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빙그레는 기반없이 새롭게 창단한 구단이었기에 한명의 선수도 아쉬운 입장이었다.
장종훈은 당시 300만원의 연봉을 받고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한다.

이듬해 장종훈 선수가 퇴출대상으로 분류되자, 당시 배성서 감독이 이재환 수석코치에게 부탁하여 이재환 코치가 구단 고위층을 은밀하게 만나서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하여 겨우 팀에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식선수가 되는 행운을 잡게 된다. 게다가 당시 주전을 맡고 있던 이광길선수가 부상으로 결장하면서 장종훈은 선발출장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장종훈은 데뷔 첫해 94경기에 출장해 0.270 타율, 홈런 8개와 34타점을 기록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1988년에는 전년도보다 더 많은 108경기에 출장해서 0.241의 다소 낮은 타율을 기록했으나, 홈런 12개와 57타점을 기록하며, 유격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는다.

1989년에는 112경기에 출전해 타율 0.254, 홈런18개, 46타점을 기록하면서, 당시 폭발적인 타력을 자랑하던 빙그레 이글스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중심으로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990년부터 92년까지 3년간 홈런과 타점 부문 타이틀을 3연패하며 국내 최고의 슬러거로 발돋움한다.

더욱이 프로야구 원년부터 한시즌에 30홈런을 넘긴 선수도 3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극소수였던 92년에 마의 벽으로 생각되던 40홈런을 프로야구 최초로 넘은 것은 대단한 기록이였다.

91년과 92년에 연속으로 최우수선수(MVP)의 영광을 차지한 장종훈은 골든글러브도 5차례나 수상하며 90년대 중반까지 프로야구의 간판스타로 군림한다.

빙그레 이글스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핵심이였던 장종훈

가공할만한 3시즌을 보내고 맞이한 93년.
개막전 홈런이 비로 인한 노게임으로 묻혀버렸고, 비운의 출발과 함께 장종훈은 겨울내내 따라다니던 왼쪽 무릎부상으로 인한 런닝 부족으로 부진한 시즌을 보낸다.

94시즌도 마찬가지였다. 팀은 시즌3위로 PS에 진출했지만, 93시즌에 기록한 17개 홈런에서 7개나 줄어들어 고작 10개를 기록했고, 34타점으로 최악의 4번타자로 전락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90~92시즌 보여줬던 장종훈의 폭발적인 타격과 거리가 멀었던 2시즌이었다.

최악의 2시즌을 보내고 95시즌 장종훈은 화려한 부활을 한다.
하지만, 95시즌을 시작으로 널뛰기 성적이 시작되었다.

전경기 출장과 0.326 타율, 홈런22개, 78타점으로 왕년의 장종훈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96시즌 90경기, 0.266, 홈런 15개, 57타점으로 부진하더니,
97시즌엔 121경기, 0.293 타율, 홈런 22개, 76타점을 정상급 활약을 펼치고,
98시즌에는 118경기, 0.275 타율, 홈런 17개, 66타점을 기록했다.


우승의 영광

99시즌 한화로써의 최고의 시즌이었다. 빙그레 이글스 시절부터 계속된 만년 준우승팀이라는 꼬리표를 떼는 시즌이었고, 정민철의 해외진출을 앞두고 있었던 중요한 시즌이었다.

한화는 로마이어-데이비스. 용병듀오와 함께 중심타자 장종훈 등을 앞세워 탄탄한 공격력을 형성했고, 구대성-정민철-송진우등의 라인을 구성하며 막강투수진을 자랑했다.


장종훈은 126경기에 출장. 0.284 타율, 홈런 27개, 86타점을 기록하며 용병듀오에 밀리지 않는 성적을 냈다.

한화는 어렵게 PS에 진출하게 되었다. 양대리그제도 첫해였던 당시, 한화는 PO에서 두산을 만나 가볍게 제압하며 KS진출을 하게 된다.

한화의 상대는 삼성과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이고 온 롯데. 롯데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고, 전력상으로도 한화보다 아래에 있었다.
한화는 4승1패로 손쉬운 승리를 거두며 프로통산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비록 장종훈은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한 성적을 냈지만 맏형으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줬다.

1999년 한화 이글스 감격의 우승

장종훈은 우승의 감격을 2000시즌까지 지속적으로 유지한다.
타율0.264로 조금 떨어지기는 했지만, 홈런 28개와 81타점으로 한화의 중심타자로 활약을 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장종훈은 체력적인 열세를 드러내며 하향곡선을 그린다.
2001시즌 0.273 홈런 15개 54타점을 기록했고, 2002시즌은 경기출장수도 약 20경기 줄어든 101경기에 출장 0.248타율 홈런12개 42타점 마크했다.


기록의 사나이 마침내 은퇴

2003시즌 한화는 유승안 코치를 감독으로 내정한다.

신임 유승안 감독은 팀의 체질개선을 선언했고, 화끈한 공격의 야구를 부활시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유승안의 ‘체질개선’이라는 말 속에는 배터랑선수들은 모두 정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첫 번째 수순으로 장종훈이었다.

한때 같이 선수생활을 한 유승안 감독과 장종훈

3루수로 뛰었던 신예 김태균을 수비불안의 이유로 1루수로 수비를 전향시키고 장종훈은 백업으로 밀린다.

전반기에 백업으로 출전하고 후반기에 주전으로 기용되어 83경기에 출장하면서 0.243타율 홈런6개 27타점을 기록했다.

2004시즌엔 70경기에 출장해 0.255 타율, 홈런 6개, 27타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2005년에도 부진이 계속되자,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장종훈은 1990년대 명실공히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간판타자였다.

90년대에만 골든글러브 4차례 수상. MVP 2회수상. 최다안타 1회. 홈런왕 3회. 타점왕 3회. 득점왕 2회, 장타율 4회. 출루율 1회 등 무수한 타이틀을 차지했다.

또한 장종훈은 개인통산 최다인 1천949경기에 출장해서 6천290타수 1천771안타로 통산 타율 0.282, 340홈런, 1천145타점을 기록했고, 홈런과 타점, 득점, 경기, 타수, 안타, 4사구에서 심지어 삼진까지 타격의 각종 기록에서 통산 1위에 올라 있는 말 그대로 '기록의 사나이'이다.

빙그레 이글스 시절부터 투타의 핵이였던 장종훈과 송진우

꼭 시골에서 금방 올라온 학생처럼 너무 착하게 생기고, 심성도 너무 착해 '촌놈'이라는 정겨운 별명도 가지고 있는 장종훈 선수는 기록도 기록이지만, 유일무이한 연습생의 성공신화를 이루며, 2군에 뛰고 있는 젊은 선수한테 많은 꿈과 희망을 주기도 했다.

2군에서 연습생으로 선수들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역할을 했던 장종훈이 한국 최고의 타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피나는 노력과 불굴의 의지로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겼기 때문이었다.

올스타전에서 경기끝난후 헹가래받는 장종훈

 "20년전 프로야구에 첫 발을 내딛던 연습생의 마음처럼 이제는 최고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그 때의 그 마음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겠습니다. 팬 여러분께서 저에게 보내 주신 사랑은 평생 잊지 못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팬 여러분께서 보내 주셨던 과분한 사랑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졸출신 연습생선수로 들어와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고 대기록을 남긴 장종훈.
진정 프로야구가 낳은 이 시대 최고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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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덧글을 남기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덧글을 남기면 왠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왠지 아세요?

덧글(꼬리글,댓글,리플,reply)을 남김으로 인해 한가족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을 수 있고, 사람들의 생각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고 할 수 있죠.


2. 덧글이 글쓰는 님에게 작고 기쁜 선물이 됩니다.

글 쓰시는 분 입장에서는 내 게시물을 과연 누가 볼까?

가끔씩 생각하곤 합니다.

덧글이 많으면 왠지 힘이 더 솟는듯 하고, 덧글을 읽는 재미에 좀 더 좋은 게시물을 작성하고자 더욱 정성을 깃들여 게시물을 작성할 수 있도록 해 주곤 합니다.


3.
덧글이 궁금해서 더 많이 조회하게 됩니다.

게시물만 읽고 나갔는데, 다음날 보니, 덧글이 엄청 쌓였답니다.

덧글이 쌓이면, 덧글이 더 궁금해서 읽었던 게시물을 한번 더 읽게 되곤 하죠.

덧글을 통해 간만에 접속한 님들의 소식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고, 재밌는 덧글이 없나 궁금해서라도 한번 더 보게 되죠.


4.
머리를 쓰게 됩니다.

덧글을 쓸려면 어떤 덧글을 남겨야 할까?

이렇게 쓰면 좋을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치매 예방을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죠.


5.
타자가 늡니다.

자판 타수가 느리시다구요?

이제부터, 덧글을 남기실 때마다 연습해 보세요.

금방 늘어만 가는 자신의 타수 실력을 보실수 있습니다.


6.
손가락운동, 손목운동이 됩니다.

컴퓨터 사용을 하실때, 마우스만 사용하다 보면, 손이 근질 근질 거릴때가 있습니다.

이럴때 덧글을 쓰다보면, 저절로 손가락및 손목에 뭉쳐져 있던 근육들을 풀게해 주는 운동을 하므로 쉽게 운동효과를 볼 수 있게 되죠.


7. 작가가 되는 길에 한걸음 다가갑니다.
 
가장 중요한것은 덧글을 쓰려면 내용을 알아야 하니 글을 찬찬히 보게되면서 문학이 성장되면서 글 내용도 점점 좋아지고 한정되어 있으니 함축해서 글을 쓰게되면서 시나 글을 쓰는데 두려움이 없어지면서 자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8. 성격이 좋아집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성격도 제각각 때론 패쇄적인 성격이 있는 사람들도 많지요.


특히 여인들에게 자주 나타나지요.어차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사람들은 덧글을 쓰다보면 자연히 친화적인 성격으로 변해가고 밝은 사람은 자기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됩니다.


9
.좋은 인연을 만들수도 있습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버상이지만 때로는 만나기 힘든 인연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학연, 지연, 혈연등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만나는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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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익스플로어9가 출시되자마자 업데이트를하고 며칠간 사용했으나, 특정사이트에서 마우스커서가 안놓이는 현상과 티스토리 블로그에서 몇가지 오류때문에 삭제를 했습니다.

블로거에겐 치명적인 익스플로러9 오류

이와 같은 문제로 익스플로러9로 성급히 업데이트했다가 삭제를 원하시는 분을 위한 팁입니다.

인터넷 익스플로어9는 빠른 성능향상을 위해서 윈도우OS에 업데이트 방식으로 탑재되었기 때문에 프로그램 제거방식으로는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제어판 > 프로그램 제거에 들어가서 삭제할려고 아무리 찾아봤자 인터넷 익스플로러9는 찾을 수 없습니다.

삭제하는 방법은 제어판 > 프로그램 및 기능 > 설치된 업데이트 보기 > 인터넷 익스플로러 9선택

윈도우7은 제어판 > 프로그램 > 프로그램 및 기능 > 설치된 업데이트 보기 > 익터넷 익스플로러 9 선택하고나서 제거하면 됩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 9 설치후에 각종 오류나 문제가 생길시에 위의 방법을 이용해서 삭제하면 됩니다.

삭제
완료후에 재부팅이 되고 이전 IE 버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IE9로 업데이트했다가 각종 오류에 마음고생했는데, 다시 익스플로러8로 돌아오니 마음은 편하고 좋네요. ㅎ

익스플로러9 오류때문에 마음고생하시는 분은 위와 같은 방법이면 간단하게 삭제되고 이전버전으로 원상복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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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63년 1월 10일(양력)

출신교 : 광주무등중-광주일고-고려대

입단연도 : 1985년

체격 : 184cm, 87kg

포지션 : 투수

투타 : 우투우타

별명 : 국보, 멍게, 무등산 폭격기, SUN (나고야의 태양, 주니치의 수호신) 등

주요수상 : 프로야구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3회, 골든글러브 6회, 3년 연속 투수 4관왕, 0점대 방어율 3회 등

선동렬을 가리켜 '국보급'이라고 한다.
이 말은 그가 20세기,한국야구 100년사에서 최고의 투수라는 것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다.

물론 어느 한때 그에 필적할 만한 업적과 기록을 남긴 투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고교,대학,프로를 거치며 최고였고,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정상에 선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광주일고 시절, 호리호리한 체격에 얼굴에 여드름투성이였던 '멍게' 선동렬은 타고난 유연성으로 강속구를 뿌려댔다.
그리고, 고 3때 팀선배였던 방수원씨(전 해태투수코치)에게 전수받은 슬라이더를 선동렬식 '칼날 슬라이더'로 완성시켜 전국대회 우승과 노히트노런 달성으로 한국 최고투수로서의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82년 우승을 차지한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고려대 2학년인 선동렬의 독무대였고, 84년 LA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LA 다저스에서 당시 50만달러의 거액을 제시하며 스카우트에 나서기도 했다.
러나, 해태에서 국보는 한국에 있어야 한다며 적극 말려서 선동렬은 85년 입단 파동을 겪고 난후, 프로야구 최초로 억대 계약금을 받고 후반기부터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

데뷔전에서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좌완 김일융(당시 삼성)과의 맞대결에서 패전의 쓴맛을 봤지만, 시속 150Km를 상회하는 강속구에 직구와 구분하기 어려운 위력적인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시즌 첫해 방어율왕을 차지한다.

다음해인 86년부터 49 1/3이닝의 연속이닝무실점 기록을 세우고, 4월 19일 롯데전에서는 라이벌 최동원투수와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전을 펼치며, 1대0 완봉승을 거두고 당대 최고 투수중 한명이였던 최동원의 12연승 행진을 깬다.

선동열과 최동원은 아직까지도 프로야구가 배출한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에 방어율부문 3연패와 더불어 방어율 0.99 0.89의 불멸의 전설적 기록을 남겼으며, 무실점, 무홈런, 무4구의 3무 투수로 불리기면서 국민적 영웅의 입지를 굳힌다.

92년 시즌중에 부상을 당해 93년부터 마무리 투수로 전향한 선동열은 철벽 마무리로서 위용을 과시하며, 선동열이 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상대팀이 경기를 포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선동열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11년동안 해태 타이거즈는 세계 어디에도 유래가 없는 단기간동안 최다 우승을 차지하였다. (선동열이 선수 생활 하는 동안 6번 우승 - 86, 87, 88, 89, 91, 93년)

1990년대 중반까지 프로야구계의 절대강자였던 선동열과 해태타이거즈


주요타이틀 수상만 보면 MVP수상 3회(86,89,90) , 골든글러브 6회(86. 88, 89, 90. 91. 93), 3년연속 투수 4관왕(89,90,91), 92,94년을 제외한 9시즌동안 방어율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특히 불멸의 0점대 방어율은 3번(86,87,95)씩이나 해내었다.

통산 141승 37패 99세이브 , 방어율은 1.25를 기록한 선동열은 1996년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런 뛰어난 기록들을 수립하고 일본으로 건너난 선동열은 센트럴리그 주니치(中日)드래곤즈에 입단해 일본 데뷔 첫해 쓰디쓴 맛(38경기 5승1패8SP. 방어율 5.50)을 본다.

일본 진출 첫 해인 96년에는 낯선 무대에 적응하지 못해 참담한 성적을 남겼지만, 97년 재기에 성공해 주니치의 확실한 마무리 투수가 됐고, 일본 정규시즌 최다 세이브포인트 신기록인 38SP를 기록하며 '나고야의 태양'이라는 인상을 확실히 각인 시켜줬다.

97시즌 토탈성적은 43경기 출장 1승1패38세이브 방어율 1.28. 1년전 '선동열도 끝났다'는 주위의 평가를 통쾌하게 복수(?)한 것이다.

98시즌엔 더욱 심기일전하여 3승무패29세이브(42경기) 방어율도 1.48. 이번엔 '역시 선동열'이란 찬사가 줄을 이으면서 동열불패(銅烈不敗)라는 신조어가 매스컴을 장식했다.

나고야의 수호신으로 활약한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의 선동열


세기말 99시즌. 개인의 성적도 성적이지만 팀 우승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선동열은, 이종범(제이리),이상훈(삼손리) 등 주니치내 '코리안 삼총사'와 함께 소속팀인 주니치 드래곤즈가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한몫을 크게 담당하였다.

시즌 성적은 1승2패 28세이브 (방어율 2.61). 야쿠르트의 다카쓰 신고에게 구원왕 타이틀은 내준 것은 너무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래도 선동열은 센트럴리그 챔피온이 결정되는 시합인 9월30일의 대 야쿠르트전(진구구장)에 마무리로 등판, 도아게투수가 되며 감격의 'V포옹' 주인공이 됐다. 인터뷰에서 그는 "일본 진출이래 가장 긴장한 경기였었다"라고 토로했다.

선동열의 일본 성적은 10승4패98세이브. 100세이브에 2개가 모자란다. 일본프로야구 개인통산 세이브 부문 11위의 기록이고, 외국인 투수 가운데는 곽원치(郭原治.전 주니치. 현 대만프로야구)의 116개에 이은 두번째 기록이다.

34세의 늦은 나이에 일본에 진출해서 그만한 성적을 남겼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기록이다. 일본의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알고 있는 한국인 이름을 대라고 했더니 대다수가 '선동열'이라고 말했다는 것이 결코 과장은 아니다.

주니치를 우승으로 이끌고 은퇴한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


그 해 1999년 11월 선동열은 15년간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너무 빠른 은퇴였을수도 있지만 선동열이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해태 타이거스 입단 이후 11년 동안의 국내 프로생활과 96년 이후 일본에서 4년 등 총 15년 동안의 화려했던 선수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은퇴 후 일본 주니치 드래곤츠 프로야구팀의 코치를 맡았으며, 2000년부터 한국야구위원회(KBO) 홍보위원으로 활약했다.

2004년 삼성 라이온즈 프로야구팀의 수석코치를 맡았고, 같은 해 11월 김응용 감독이 삼성구단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선동렬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어 2010년까지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2번의 우승을 이루어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선동열(세례명 : 다두)은 매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상당한 금액을 명동성당에 희사하고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그러나, 선동열로선 또다른 꿈이 있다. 바로 한국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되는 (가칭)'선동열상'의 제정이다. 미국의 사이영상, 일본의 사와무라상과 같은 의미다.

어떠한 수식어로도 모자랄 정도로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불멸의 기록을 남긴 '선동열'이라는 이름 석자는 결코 잊을수 없을 것이다.


선동열 주요 수상 :
1981년 세계 청소년 야구 대회 MVP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 MVP
86, 88, 89, 90, 91, 93 한국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수상
86년 투수 삼관왕(방어율, 다승, 탈삼진), 페넌트 레이스 MVP
87년 승률, 방어율 1위
88년 방어율, 탈삼진 1위
89년 투수 사관왕(승률, 방어율, 다승, 탈삼진), 페넌트 레이스 MVP
90년 투수 사관왕(승률, 방어율, 다승, 탈삼진), 페넌트 레이스 MVP
91년 투수 사관왕(승률, 방어율, 다승, 탈삼진)
93년 방어율, 구원 1위
95년 구원 1위
95년 12월. 일본 프로야구 진출
97년 일본 프로야구 구원 2위


선동열 주요 기록 :
시즌 최고 방어율= 93년 0.78
경기 최다 투구수= 232개 (87.5.16 사직구장, 롯데전) 상대투수 최동원
시즌 최다 완봉승= 86년 8회
연속 경기 완봉승= 3경기 (86.8.31- 9.11)
홈경기 연승= 14경기 (88.7.27 - 89.10.2)
특정 팀 상대 연승= 롯데전 20연승 (88.8.11-일본 진출전),
태평양전 14연승 (87.8.19-90.5.9)
연속 경기 무패= 44경기 (91.8.20-93.7.14)
연속 경기 세이브= 11경기 (92.7.7-93.4.1)
연속 경기 SP= 18경기 (92.7.7-93.5.15)
노히트노런 : 89.7.6 광주 삼성전
최다 타석 무홈런= 319이닝 (89.5.29-90.9.25)
경기 최다 탈삼진= 18개 (91.6.19 광주 빙그레전 13회 연장)
연속 타자 탈삼진= 9명 (95.8.23 쌍방울전 4명, 95.8.27 한화전 5명),
9명 (95.9.7 삼성전 5명, 95.9.12 삼성전 4명)
선발 타자 전원 탈삼진= 3회
매회 탈삼진 + 선발 전원 탈삼진= 1회 (92.4.11 잠실 OB전)
연속 이닝 무실점= 49 2/3이닝 (86.8.27-87.4.12)
특정팀 연속 이닝 무실점=삼성전 42이닝(86.5.25-88.4.2)

선동열 프로야구 통산기록

연도 소속 방어율 경기 승리 패전 세이브 이닝 안타 4구 삼진 실점 자책
1985 해태 1.70 25 7 4 8 111 74 23 103 30 21
1986 해태 0.99 39 24 6 6 262 2/3 153 59 214 38 29
1987 해태 0.89 31 14 2 6 162 89 50 144 21 16
1988 해태 1.21 31 16 5 10 178 1/3 116 42 200 29 24
1989 해태 1.17 36 21 3 8 169 82 55 198 27 22
1990 해태 1.13 35 22 6 4 190 1/3 121 58 189 35 24
1991 해태 1.55 35 19 4 6 203 135 33 210 42 35
1992 해태 0.28 11 2 0 8 32 2/3 20 12 42 1 1
1993 해태 0.78 49 10 3 31 126 1/3 48 26 164 11 11
1994 해태 2.73 27 6 4 12 102 1/3 81 29 94 31 31
1995 해태 0.49 48 5 3 33 109 1/3 49 17 140 9 6
통산 1.20 367 146 40 132 1647 968 404 1698 274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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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일요일밤에(이하 일밤)은 그동안 MBC 주말예능의 간판 프로그램이었다.

1988년 11월 첫 방송 이후 '몰래 카메라', '인생 극장', '이경규가 간다', '러브 하우스', '브레인 서바이벌', '대단한 도전' 등 수많은 인기 코너를 만들어내며 일요 예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해왔다.

하지만 2008년도부터 리얼 버라이어티(1박2일과 패밀리가떴다)의 득세에 힘을 잃기 시작했다.


탁재훈이 KBS 해피선데이를 떠나 동시간대인 MBC 일밤에 들어오고부터 시청률이 급감하기 시작해서 누군가는 탁재훈의 저주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나마 일밤을 지탱해왔던 '우리 결혼했어요'와 '세바퀴'가 단독 프로그램으로 편성된 뒤에는 줄곧 한자리 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부진은 3년 넘게 이어졌다. '뜨거운 형제들'이 아바타 소개팅이라는 참신한 소재라 반짝했지만, 아바타 소개팅을 버린후 다시 시청률은 폭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달 '뜨거운 형제들'과 '오늘을 즐겨라'를 동시에 폐지하는 초강수를 뒀다.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일요일 황금시간대의 시청률 전쟁에서 살아남기위한 고육지책이였다.

이런 분위기속에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는 3년간 쓰러진 일밤의 자존심 회복을 위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첫방송전부터 MBC에 비판적인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나는 가수다에 대한 서바이벌 논란을 확산시키며 부정적인 기사들을 쏟아냈다. 애국가시청률밖에 안나오는 심야 음악프로를 일요일 황금 저녁시간대에 옮기는 첫시도였고, 성공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내노라는 가창력 있는 가수들의 혼신을 다한 열창이 이어진 첫방송후에는 분위기가 반전되며 폭발적인 호응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가창력 있는 가수를 향한 시청자들의 목마른 갈증과 서바이벌 방식이 남긴 묘한 긴장감은 눈을 뗄수없을 정도의 흥미를 유발하며, 나는 가수다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첫방송후 호의적인 기사들도 나오긴했지만, 보수언론들은 시청자들의 호평을 뒤로한채 편집논란을 부추기며 여전히 흠집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속에서 첫 탈락자로 선정된 김건모에게 원칙을 깨고 재도전을 허용하자, 기다렸다는듯이 보수언론들은 비판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며칠동안이나 예능프로 하나에 지나칠정도의 오버성 비판기사를 쏟아내며 여론몰이에 성공하자, MBC 김재철사장은 일방적으로 김영희PD를 경질하고 후임 심정수PD로 교체했다. 그리고 재정비될때까지 한달간 방송중단 선언까지 지난주 방송의 후폭풍을 거세게 맞았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속에서 27일 165분간 특집으로 꾸며진 MBC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는 방송 첫화면에 시청자들을 향한 제작진의 공식사과로 시작했다.


김건모,이소라,백지영,윤도현,김범수,정엽,박정현 가수 7명이 서로의 노래를 바꿔불렀다.
베테랑 가수 백지영은 긴장한 탓에 리허설 무대에서 멍하니 서 있다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데뷔 20년차 가수 김건모는 재도전 논란으로 거센 비판을 받은것을 의식한듯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부르르' 손떨림을 보이며 열창했는데 여느 가수보다 큰 호응을 얻었다.

7인의 가수들은 일곱가지 빛깔로 주말 저녁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한 명, 한 명의 무대가 끝날 때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165분간 특집방송으로 진행된 3월 27일 방송 이후 사람들의 반응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노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무대에 서는 그 과정이 얼만큼 힘든지 제대로 보여준 가수들에게 찬사가 이어졌다.
165분간 특별방송된 나는가수다 TV시청률은 13.7%로 높은 시청율을 기록했다.


방송직후 시청자들은 "많이 아쉽습니다. 빨리 돌아오길 바랍니다","좋은 프로그램은 롱런해야 합니다", "20년차 대가수가 손을 떨며 노래하는데 너무 돌을 던진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련하다", "왜 이렇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도 급급했던걸까요", "한번 더 지켜볼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즉각적으로 비판하고 돌을 던진 네티즌들의 나쁜 예를 한번 더 본 것 같네요", "이 프로그램은 예능이 아니라 예술입니다. 열정의 산물인 이 프로그램이 꼭 돌아오길 바랍니다" 등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시청자들은 너무 성급했던 쌀집아저씨 김영희 PD의 교체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방송장악저지 반MB 노조에 수장이다 보니까 이명박 낙하산 김재철MBC사장에 의해 일방적으로 짤렸다며 울분을 토로하고 복귀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현재 MBC 노동조합이 MBC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의 김영희PD경질에 대해 "김재철사장이 '예능국원들이 반발하면 내가 직접 설득하겠다'고 호언하며 밀어붙였다"라고 밝혀서 파장이 일고 있다.


노조는 29일 발표한 성명에서 "PD교체는 최악의 결정이었다. 징계를 통하여 연출에게 경고하고 이후 만들어질 방송분을 통해 시청자에게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두자는 게 예능국 수뇌부의 결정이었음에도 임원진은 전격적으로 'PD경질을 종용했다"라고 비판했다.

노조는 "콘텐츠 제작공정에 대한 임원진의 몰이해는 '일밤' 파행방송으로 이어지고 주말 예능 경쟁력에 치명상을 입혔다"라며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일일저녁연속극 '폭풍의 연인'도 몇몇 임원진이 무조건 조기종영을 준비해 결국 아침드라마로 준비 중이던 드라마를 대체투입한 결과 최악의 시청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라고 성토했다.


'나는 가수다'는 김영희 PD에서 신정수 PD로 제작진이 교체되면서 4월 한달간 결방될 예정이여서 파문은 더욱 확산될 조짐이다.

시청자들은 나는가수다를 보기를 원하지만, 불과 한주를 참지못한 지나친 마녀사냥의 결과 한달동안이나 볼수 없게 되었다.

예전 故노무현 전대통령이 보수언론의 아니면말고식 여론몰이성 비난기사들에 의해 쓰러져 다시는 볼수 없게 된것처럼..

첫방송전부터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예능프로로서는 이래적으로 보수언론의 집중표적이 된 MBC 일밤의 나는가수다.

쌀집아저씨 김영희PD교체후 어느정도 임무(?)를 완수한 보수언론은 방송후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속에서 중립적으로 관망하고 있다.

지난 한달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논란과 화제를 뿌린 나는가수다의 향후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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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인터넷 익스플로러8을 사용하다가 익스플로러9로 업그레이드하자마자 몇몇 오류들이 보이는군요.

특히 티스토리 블로그에 글을 주로 올리는 블로거들에게는 치명적인 오류들이 있어서 익스플로러9를 다시 삭제했습니다.


1. 스킨 위자드 사용 불가능

인터넷 익스플로러9에서는 관리자모드의 [스킨-스킨 선택]에서 스킨 위자드로 들어가면 무한 리플레쉬가 되면서 계속 화면이 깜빡거려서 스킨위자드 사용이 불가능해집니다.



2. 위젯 사용 불가능

기존의 인터넷 익스플로러8 이하에서는 관리자모드 [플러그인-위젯 설정]으로 들어가면 아래와 같은 화면이 뜹니다.


그러나 익스플로어9에서는 리스트가 뜨지 않습니다. 다시 메뉴에서 전체를 클릭해서 선택하면 설정가능한 위젯 리스트들이 뜨긴합니다만, 리스트만 뜰뿐 위젯의 설정과 해제 자체가 되질 않습니다.

그밖에 자바스크립트 오류들이 종종 뜨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익스플로러9를 삭제했습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9가 인터넷 서핑속도를 개선하고 보완쪽 문제도 많이 보강되었다고 하니 인터넷 서핑을 주로 하시는분은 업그레이드해도 되겠지만, 티스토리 블로그를 자주 이용하시는 블로거라면 익스플로러9의 각종 오류들이 수정되기 전에 사용하는것은 무리가 있어보이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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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프로야구계 최대 이슈는 제 8구단의 창설이었다.

1986년 빙그레가 창단되면서 프로야구팀이 7개팀으로 운영되다 보니 하루에 한팀씩은 경기를 치룰 수 없는 절름발이식 경기스케쥴이 문제가 되어 제8구단 창설이 이슈가 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KBO이사회는 제 8구단을 창단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대상기업의 자격에 대한 원칙을 세운다. 다음은 당시에 세워진 창단에 대한 기본원칙이다.

▲가입업체 기준은 기업 전체의 연간 매출액이 5천억원 이상이어야 하고 프로야구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기업.

▲가입조건은 프랜차이즈 안에 현대식 구장을 확보하고 50억원 이상의 가입금을 낼 것.

▲창단시기는 가입희망 기업을 확정한 후 단시일 내에 한다.

▲선수확보 방안으로는 각 구단이 필요로 하는 22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 중에서 신생구단이 2명씩 지명트레이드 할 수 있다.

▲신생팀 창단 후에는 8개 팀을 2개 리그로 분리운영하고 다른 리그에 속한 팀과도 대전하되 한국시리즈는 양리그 우승팀간에 치룬다.


창단에 대한 세부원칙이 정해지고 먼저 제 8구단 창단에 나선쪽은 한일합섬이었다. 한일합섬은 열성적인 야구팬이 많은 마산과 경남을 연고로 89년 3월 22일 창단신청서를 낸 것이었다. 이어서 쌍방울과 미원이 연합기업형식으로 쌍방울 70%, 미원 30%의 비율로 투자한다고 밝히고, 같은 해 4월 10일 전북을 연고로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겠다고 창단신청서를 제출한다.

당시 한일합섬은 팬들의 호응도와 시장능력, 장기적인 팀간 전력 균형등 여러 방면에서 전북에 기반을 두고 창단하려 한 쌍방울-미원 연합기업보다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4월 말 한일합섬이 "표대결을 벌이면서까지 프로야구단을 유치할 생각은 없다"며 창단을 백지화했고, 결국 쌍방울은 그 해 7월 8일 임시구단주 총회에서 6표를 얻어 국내 프로야구 제 8구단 창설권을 획득했다. 그 당시 일각에서는 한일합섬의 창단 백지화 선언이 정치적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나하는 추측도 있었다.


레이더스의 태생적 한계

따지고보면 태생이 불순했던 레이더스였다.
레이더스는 가장 자본주의적인 스포츠인 프로야구에서 정치적인 논리로 탄생된 팀이였다.

당시 쌍방울이 전북을 연고로 프로야구단을 창단하면서 호남지역의 단결력을 줄이기 위해 전북지역에 야구단을 둔다는 루머가 급속도로 퍼져나갔었다.
더구나 연합기업으로 창단신청서를 제출했던 미원이 레이더스가 해체되던 순간까지 단 한차례도 야구단 운영에 참여하지 않은 사실을 보면 더욱 설득력을 가졌다.

또한, 제 8구단 창단 조건으로 연간매출액 5천억원 이상의 기업 등 3가지 조건이 제시됐으나 쌍방울은 자격미달이었다.
당시 쌍방울는 내의전문업체에서 토탈 패션업체로 발전하였고, 무주리조트를 개발하는 등 레저산업계의 총아로 발전하면서 내실이 단단한 그룹으로 평가받고 있었지만, 구단주총회에서 제시한 가입조건에는 미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구단들은 쌍방울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4차례 연속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등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던 해태 타이거즈를 견제하기 위해선 전남북을 쪼개야 유리하다는 계산속에 쌍방울의 창단에 동의했던 것이다.

당시 쌍방울은 50억의 창단가입금을 냈고, 이중 20%인 10억을 연고지의 일부인 전북을 내어준 해태가 챙겼다.
해태 타이거즈는 10억에 자신의 한쪽팔을 내어줬고, 레이더스의 해체이후에 다시 찾게 된다.

레이더스 프로무대 성적표

레이더스는 지난 90년 창단을 선언하고 그해 2군무대에서 우승을 거둔 뒤 91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프로에 참가한다.
다음표는 99년을 끝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진 레이더스의 통산 성적표다.

연도

소속

경기

승률

순위

안타

홈런

도루

타율

방어율

1991

쌍방울

126

52

71

3

0.425

6

1041

87

130

0.253

4.69

1992

쌍방울

126

41

84

1

0.329

8

1015

90

89

0.249

4.85

1993

쌍방울

126

43

78

5

0.361

7

903

46

117

0.225

4.00

1994

쌍방울

126

47

74

5

0.393

8

1027

87

151

0.248

4.74

1995

쌍방울

126

45

78

3

0.369

8

1054

83

131

0.254

4.67

1996

쌍방울

126

70

54

2

0.563

3

1085

58

85

0.264

3.33

1997

쌍방울

126

71

53

2

0.571

3

1090

110

81

0.269

3.82

1998

쌍방울

126

58

66

2

0.468

6

1089

101

93

0.261

4.04

1999

쌍방울

132

28

97

7

0.224

8

1108

86

126

0.248

5.85

통산

 

1140

455

655

30

0.410

9412

748

1003

0.252

4.60


레이더스는 9년동안의 프로무대에서 대부분 하위권이었다. 하지만 96년과 97년 레이더스는 돌풍을 일으키며 2년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그 시절 레이더스는 '공포의 외인구단'이라 불리웠다.


96, 97시즌 레이더스의 돌풍

◀ 쌍방울 레이더스 돌풍의 주역인 김성근 감독

95년 8개팀 중 8위를 차지한 레이더스는 김성근씨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하고 96시즌을 시작한다.
91년 프로무대에 뛰어든 이후 5시즌 동안 세 차례 꼴지를 포함, 매시즌 6위이하의 성적을 거두던 레이더스는 김성근을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하고 신인 스카우트에도 지난 96년(4억여원)보다 4배나 많은 15억여원을 투입하는 등 의욕적으로 시즌을 시작하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김성근 감독은 95년 11월부터 5개월여동안 일본 오키나와에서 지옥훈련을 펼치며 96시즌 레이더스의 돌풍을 시작할 준비를 마치고 시즌에 돌입한다.

시즌 전 전문가들은 레이더스를 타이거즈와 함께 하위권으로 분류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자마자 레이더스는 광주에서 해태와의 개막 2연전을 모두 승리하는 등 상승세를 이어갔고, 4월 26일에는 선두에 올라서는 등 96시즌 초반부터 돌풍의 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시즌 내내 상위권을 유지하던 레이더스는 결국 70승 54패 2무의 성적으로 해태에 이어 시즌 2위로 창단 후 첫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다.

레이더스의 돌풍은 플레이오프에서도 이어졌다. 시즌 성적 4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현대가 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를 승리로 거두고 레이더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었다.
레이더스는 현대에 먼저 2게임을 승리한다. 한국시리즈 진출의 9부능선을 넘은셈.

언론에서는 해태와 쌍방울의 사상 첫 호남선시리즈가 시작될거라며 흥분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신생팀 현대가 막판 무서운 저력을 발휘하며 3연승, 레이더스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무산시킨다.

96시즌 레이더스는 비록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하지만, 만년하위팀의 꼬리표를 떨쳐 버린 의미있는 한해였다.

이듬해인 97시즌 레이더스는 이렇다 할 전력보강을 하지 못했다. 신인 중에는 좌완 투수 오상민 정도가 눈에 띄었고 영입선수로는 은퇴를 목전에 둔 한대화, 김성래, 이종두등이 있었다. 시즌 초 전망도 전년도 패넌트레이스 2위라는 성적이 무색하게도 최하위권으로 분류됐었다.

예상대로 레이더스는 97시즌 시범경기에서 1승 8패의 참담한 성적을 기록하며 시즌 전망을 어둡게 했다. 설상가상 특급마무리 조규제와 선발의 한 축을 담당하던 박성기가 부상으로 전력에 구멍이 생겼다. 지난해 레이더스 신인 중 최고의 활약을 펼쳤던 석수철마저 부상으로 전력에서 완전 이탈하고 말았다. 또한 96시즌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특급포수로 성장한 박경완마저 시범경기에서 오른쪽 팔꿈치부상을 당했다. 그야말로 초상집에 불난 격이었다.

하지만 시즌이 시작되자 레이더스는 저력을 보였다. 개막 후 LG와 OB를 상대로 4승 1패를 기록하며 돌풍을 시작했다. 지난해 8월 11부터 시작된 홈경기 연승기록을 17로 늘렸다. 불과 얼마전 시범경기 1승 8패의 성적을 기록했던 팀으로는 믿기지가 않는 놀라운 상승세였다.

결국 레이더스는 97시즌에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 71승 53패 2무 시즌 3위였다. 시즌 초부터 끊이지 않았던 부상선수 속출과 시즌 막판 팀매각계획 발표 등 온갖 악조건을 딛고 2년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오봉옥, 김기덕, 성영재, 박성기 등 주축투수들의 잇따른 부상이라는 악재도 레이더스의 저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시즌순위도 초반 5위에서 7월경 4위로 끌어올렸고, 결국 정규시즌을 3위로 마감해내는 불굴의 투혼을 발휘했다. 비록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1승2패로 패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레이더스의 투혼은 충분히 박수받을 만한 결과였다.

데이터 야구 김성근 감독, 90년대 최고 좌타자 김기태, 특급마무리 조규제, 97시즌 다승왕 및 방어율왕, 승률왕에 빛나는 김현욱, 리그를 대표하는 포수로 성장한 박경완, 어린왕자 김원형, 이적생 김성래, 김광림, 박노준, 오봉옥, 이밖에 김실, 심성보, 조원우, 박성기, 성영재, 김기덕등 이 시기 레이더스의 돌풍의 주역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불굴의 투지로 똘똘 뭉쳐있었다.


간판 선수의 잇따른 현금 트레이드

◀ 쌍방울 레이더스의 에이스였던 어린왕자 김원형

레이더스는 96, 97시즌 2년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등 재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모기업인 쌍방울이 부도처리되면서 팀매각을 공식선언했고 97시즌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었던 간판선수들을 타구단으로 현금 트레이드하기 시작했다. 팀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97시즌 말미에 한대화, 박노준, 이종두등 노장선수 3명은 은퇴의사를 나타냈고, 2년연속 포수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인 박경완은 현대에 현금 9억원에 트레이드 됐다. 이밖에 한기철, 김미호등 9명은 보류명단에서 빠졌다. 이 와중에 새롭게 시행되는 용병제도에도 불구하고 레이더스는 국내 8개구단 중 유일하게 용병영입을 하지 못하고 98년 새해를 맞이했다.

새해를 맞이해서도 레이더스는 추가로 몇몇 선수를 임의탈퇴로 공시하고 98선수단 규모를 47명으로 운용하기로 결정한다.

얼마뒤에는 레이더스 1차지명 선수인 조진호가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을 맺는다. 쌍방울로써는 파격적인 2억원의 계약금을 제시했지만 조진호는 2억원으로는 병중인 아버지의 병원비에 부족하다며 5억원을 요구, 결국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을 체결하게 된 것이다.

결국 레이더스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98시즌을 시작하고 98시즌 동안에도 특급마무리 조규제를 현대에 현금 3억 + 전주구장 광고협찬 3억 + 가내영, 박정현과 트레이드한다. 이해 레이더스는 58승 66패 2무의 초라한 성적으로 시즌순위 6위를 차지하며 시즌을 마감한다.

시즌이 끝나자 레이더스는 다시한번 팀운영자금을 마련하기위해 김기태와 김현욱등 두 간판선수를 삼성에 현금 20억에 트레이드 한다.

레이더스는 그야말로 앙꼬없는 찐빵신세가 되었고, 99시즌 다시 꼴지로 복귀하였고 결국 팀이 해산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레이더스 역사속으로


97년 10월 16일 (주)쌍방울 개발의 최종부도를 시작으로 같은 달 26일에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최종부도를 맞이한다. 이 후 간단선수들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레이더스는 99년 7월 16일 이의철 구단주가 박용호 KBO총재와의 비밀회담에서 최초로 매각의사를 밝힌다. 물론 전부터 팀매각 협상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쌍방울관계자의 팀 매각의사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매각협상은 지지부진해서 진전이 없었고, 결국 99년 11월 16일 쌍방울 레이더스 김종철 신임구단주는 박용호 KBO총재와의 회담에서 2000시즌 팀을 꾸려나갈 능력이 없다고 최초로 밝힌다.
이때 프로야구단에 관심을 보인 SK그룹은 쌍방울과의 협상은 철저히 배제하고 KBO하고만 접촉하면서 레이더스 구단의 인수가 아닌 새로운 구단의 창단으로 프로야구에 뛰어들 계획을 갖는다.

법정관리 중인 쌍방울 입장에서는 야구단을 넘기는 조건으로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아내야 하지만 SK는 반대입장이었다. 며칠 후면 자동적으로 퇴출되는 쌍방울과 만날 이유가 없는 까닭이었다.
만약 쌍방울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쌍방울이 자동으로 퇴출되는 2월 12일까지 기다렸다 새로운 팀창단의 수순을 밟는 다는 것이 SK의 생각이었다.

한편 쌍방울 구단은 2000년 1월 23일부터는 선수들에게 식사도 제공하지 못했다. 아직 남은 선수들의 1월 연봉도 지급되지 못할 형편이었다. 선수들은 훈련이 끝나고 샤워조차 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야했다. 매각당사자들은 버티기만 했다.
결국 쌍방울은 얼마못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SK가 프로야구에 참여할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 후 쌍방울은 퇴출되었고 SK는 새로운 구단을 창단했다. 결국 쌍방울 레이더스는 9년간의 짧은 흔적을 남긴채 역사속으로 사라졌고, SK는 레이더스의 인수가 아닌 새로운 팀의 창단으로 레이더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레이더스 소속 선수들은 전원 웨이버로 공시됐고, SK는 자유계약선수 영입의 형태로 레이더스 소속 선수들을 새로운 창단팀으로 영입했다.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김성근 감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96, 97시즌. 두 시즌 동안 보여준 '공포의 외인구단' 쌍방울 레이더스의 투혼은 영원히 야구팬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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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명부

출신교 : 돋도리이시고

활동 : 요미우리 - 73난카이 - 73히로시마 - 77히로시마, 83삼미 - 85청보 - 86빙그레
 
포지션 : 투수, 우투우타

별명 : 너구리
 
우리나라 역사상 한투수가 이토록 완벽하게 리그를 지배한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장명부'. 선동렬,최동원의 전성기엔 상대는 그 날만 포기하면 됐지만, 장명부는 완봉승을 거두고도 다음날 또 던졌다. 실로 그는 초인 아니 마인이었다.
 

◀ 히로시마 카프 시절
 
1968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에 연습생으로 입단해 난카이(73년), 히로시마(77년)에서 선수생활을 한 그는 82년 3승11패의 성적을 마지막으로 은퇴의 길을 택한다. 말 그대로 한물 간 투수였던 것이다.
82년을 참담하게 보낸뒤 삼미 슈퍼스타즈는 새로운 전력을 보강하여 83시즌을 맞는다.
일본에서 82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장명부는 삼미의 끈질긴 구애에 못이겨 한국행을 결심한다.
 
삼미는 천문학적 액수인 4000만엔 (1억2천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그를 영입했는데 당시 국내 최고 연봉선수였던 박철순의 연봉은 2천4백만원이었으니 얼마나 큰 돈인가. 게다가 주택까지 제공 되었다.
그만큼 그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 입단식

 
장명부의 입단과정도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그의 한국행이 결정되자 삼미는 기뻐서 신문에 대서특필을하기 시작하는데 오래간만에 비보가 아닌 주제로 신문에 삼미의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
 
한국에 가기로하고 난후 계약날짜가 남아 있자 장명부는 당시 일본에서 전훈중이던 삼성의 스프링캠프를 찾아가 배팅볼투수를 자청하며 삼성타자들을 상대로 배팅볼을 던져 준다. 이에 삼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삼미에게는 "나 아직 계약 안했는데"라며 응수해 삼미를 더욱 긴장시킨다. 하지만 장명부는 배팅볼을 던져주며 이만수,장효조등 국내 최고 삼성의 막강타선을 분석했던 것이다.
 
그래서, 타격의 달인 장효조도 전기리그에 서 그를 상대로 15타수 1안타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20승은 기본, 30승이 목표"

 

입단 기자회견에서 장명부는 "20승은 기본,30승이 목표다.20승도 못하면 유니폼을 벗겠다"고 말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다.삼미의 허영 사장과 KBO 이호언 사무차장은 장명부의 승수를 놓고 30승은 힘들고 박철순의 24승 정도를 예상했다.
이를 들은 장명부는 허영사장에게 만약 30승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본다.
이에 허사장은 어짜피 30승은 불가능 할꺼란 생각에 농담조로, "30승을 하면 1억원을 보너스로 주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농담조로 말한 허사장의 약속을 장명부는 가슴속 깊이 세긴다. (뒷날 이약속은 큰 문제를 일으킨다.)
한국에 와서 구단에 상대팀 타자들의 자료를 요구 했지만, 그당시 국내엔 그런 자료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자료를 만들기로 하고 감독에게 시범경기에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경기에 출전시켜달라고 한다.
 
그리곤 시범경기에서 직구로만 승부하며 타자들의 장단점을 파악해 자신만의 자료를 만들어 나간다.
시범 경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상대팀은 '장명부 별거 아니네'하며 방심한다.
이런 주도면밀한 계획이 있었기에 불멸의 30승은 가능했던 것이다.
 
 
◆삼미의 돌풍 주역 "장명부"
 
시즌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꼴찌팀 삼미의 돌풍! 그 한가운데는 장명부가 있었다. 우리나라 야구 역사상 한투수가 이토록 완벽하게 리그를 지배한적은 없었다.
 
선동렬,최동원의 전성기 때는 상대팀이 그들이 나오는 게임만 포기하고 다음 게임을 노리면 됐지만 장명부는 아니었다. 완봉승을 하고도 다음날 또 던졌다. 순위 경쟁이 한창이던 8월에는 나흘 연속 등판해 완투승, 2이닝 마무리, 2.1이닝 마무리, 완투승이라는 엽기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00게임중 60게임에 등판해 30승16패6세이브를 기록했는데 몇이닝이나 던졌을까? 요즘은 투수가 200 이닝을 던지면대단한 투수로 인정을 받는데 그의 투구이닝은 자그마치 427.1/3이닝이었다. 정말 철완이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등판한 이유는 바로 돈 때문,
 
시즌전 허영사장과 약속한 30승=1억 이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00게임에 정상적으로 출전해선 30승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곤 감독을 졸라 선발 중간 가리지 않고 등판해 목표인 30승을 이뤄내고 만다.
 
*여기서 잠깐 - 당시 삼미의 투수였던 분을 만난적이 있는데 당시의 장명부는 팀이 이기고 있는 게임에 구원등판해서 일부러 실점을 허용해 동점을 만들어 준 뒤 그때부터 전력투구를 해 선발투수의 승리를 가로채기도 했다고 한다. 30승 아니 1억원을 위해... 
 

그의 엽기적인 시즌 기록을 정리해보자.
 
*시즌 최다승-30승 *시즌 최다 선발-44게임 *최다 완투-36
* 최다 완투승26(5완봉승) *최다 선발승-28
*최다 투구이닝-427 1/3 *최다 타자-1,712 *최다 타수-1,559
*최다 연속게임 완투승-8 *월간 최다승-9승(5월)
*최단기간 20승-115일(34게임) *최다이닝 완봉승-12이닝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한국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작성한 그는 올스타전에 팬투표로 뽑혔고 골든글러브 투수부분을 당연히 수상했다.

선발로 나가면 완투. 마무리로 나가면 세이브로 보통땐 슬슬 던지다 위기땐 전력 피칭으로 삼진을 잡아냈다.
당시 국내 타자들에겐 생소한 사이드암 투수인데다 145km의 빠른 직구와 낙차큰 커브, 스크류볼등 변화구의 완벽한 제구력과 능수능란한 완급조절 ,수읽기,틈틈이 던지는 위협구등 기존 국내 투수들관 비교도 안되는 무시무시한 투수였다.
 


지금도 '장명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빈볼' 항상 빙글빙글 웃는 포커페이스인데다 상황에 따라 타자의 머리통을 향해 거리낌 없이 빈볼을 던지고 나서 놀란 타자를 바라보며 아무렇치도 않게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마치 '너구리'같아 '너구리'란 별명을 갖게 되었는데 그 결과 집단 난투극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 관중들에게 야구의 또다른 재미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장명부에게 인천팬들은 '너구리'라면을 BOX채로 선물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 빈볼도 그는 아무때나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막상막하의 경기서 상대팀이 대타를 자주 기용해 엔트리 대부분이 출장했을 때 빈볼을 던져 상대팀에서 빈볼을 맞아 부상당한 선수대신 대타로 내보낼 선수가 없게 되거나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 경우를 노린 것이다. 모두가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처음가보는 구장에선 항상 공 세개를  홈플레이트에서 1루,3루,마운드 쪽으로 살짝 굴려보았다. 번트나 빚만은 타구가 나왔을 때 어떻게 타구가 흐르는지를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경기중엔 타자도 타자지만 다음 타자가 뒤에서 스윙연습 하는 것을 살펴봤다. 보통 자기가 좋아하는 코스로 스윙하기 때문에 거기로 안던지기 위함이었다. 타자도 보지만 다음타자까지도 봤다는 얘기다.
 
이번엔 그가 어떻게 무지막지한 연투가 가능했는지 그의 말을 들어보자. "1번부터 9번까지 9명의 타자가 공격에 나서지만 타자의 역량은 모두 같지 않다.
 
1번은 빠른 타자고 3번은 잘치는 타자, 4번은 힘있는 타자다. 7,8번은 그팀에서 가장 타격이 약한 선수들이다.
 
내가 많은 횟수를 던지고 연투할 수 있는 것은 힘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3~5번 정도의 타자와는 전력승부를 하지만 하위타자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9회를 완투해도 조심해서 상대하는 경우는 10번 미만이다"
 
   
장명부는 너구리답게 연봉협상의 귀재였다
 

어쨌거나 이런 장명부의 활약으로 삼미는 좋은 성적을 냈지만 악재가 겹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하고 만다.
다음 시즌인 84년 역시 그의 어깨에 삼미의 운명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83년 30승을 올릴 경우 1억원의 보너스를 지급 하겠다던 혀영사장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당초 농담으로 했던 말이 현실로 다가오자 허사장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1억원 보너스약속은 정식 문서에 의해 작성된 옵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단 운영비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하지만 장명부는 허사장에게 집요하게 돈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허사장은 그 금액의 일부를 주고 장명부를 달래야 했다.그돈은 허사장의 사비였다고 한다.이에 회의를 느낀 장명부는 "한국 야구가 아무리 너절하기로서니 사장까지 실언을 하느냐.모두가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했다.
 
장명부는 구단과 한국야구계를 비난하며 태업을 벌였고 전년도 무리한 탓에 성적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13승 20패 7세이브 방어율3.30으로 성적은 악화되었다.
또한, 투수코치를 겸한 장명부는 팀내 라이벌인 임호균을 롯데로 트레이드 하고 박정후,정성만,신태중 등을 받아 들여 키우려고 했지만 이들 셋이 거둔 승수는 14승27패에 불과했다. 결국 팀은 다시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시즌뒤 삼미와 장명부는 지리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지난해 성적의 반에도 못미치는 성적을 올린 장명부는 시즌전 연봉계약시 약속한 벌금과 구단의 연봉삭감 방침에 맞선다.
선수분 3천만엔(약1억5백50만원),코치분 3천만원을 합친 1억3천5백50만원을 받았던 장명부는  20승을 못올릴 경우 1만달러(약8백만원)의 벌금을 내기로 한것이다.
장명부는 벌금은 내겠지만 연봉 삭감에 대해선 강력히 거부한다.
 

◀ 사진 제목 '참담한 장명부'
 
당시 김진영 감독도 팀이 꼴찌를 한 책임을 지고 연봉에서 500만원을 감액하기로 했는데 장명부는 워낙 연봉이 많았기 때문에 구단은 훨씬 만은 금액을 삭감하려한 것이다. (김진영 감독의 연봉은 2천4백만원)
 
이 과정에서 구단과 장명부는 감정이 상해 구단에선 그를 보류선수로 묶겠다고 한다. 이에 장명부는 법적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버틴 것이다. 결국은 2,800만원이나 삭감된 1억7백 50만원에 계약을 하고 만다. 이번엔 구단이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장명부는 삼미라는 구단에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85년에도 장명부는 고단수의 연봉협상 끝에 전년대비 28%인상된 3천2백만엔(1억1천8백만원)을 받는 대신 시즌 성적이 14승 이하일 경우 위약금 4천만원, 15~19승일 때 위약금 1천6백만원을 구단에 납부하고 20~24승일 땐 보너스 1천6백만원, 30승 이상일 땐 보너스 6천만원 추가의 옵션계약을 맺었다. 또 2세이브는 1승으로 치기로 했다.

이렇게 계약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동계훈련을 하지 않아 구위가 현저히 떨어지고 말았다.
 
오로지 장명부만 믿고 있었던 삼미는 장명부의 부진으로 팀이 뒤죽박죽 돼 '1인 의존'의 피해를 절실히 당하고 만다. 상대팀들은 이런 삼미의 사정을 알고는 삼미에 지는 것은 수치라고 여기며 전력을 다해 철저히 삼미를 짓밟았다.
 
85시즌 중 팀은 청보로 넘어갔는데 시즌이 끝나자 청보는 폐품이 되어 버린 장명부의 처리문제로 고심하게 된다. 시즌전 연봉 협상에서 합의한 옵션에 성적이 못미친 것이다. 11승 25패 5세이브로 2세이브를 1승으로 쳤을 때 13.5승이 돼 장명부는 구단에 4천만원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이에 청보는 장명부에게 엄청나게 삭감된 86연봉을 제시해 장명부가 이를 거부하자 11월22일 미련없이 자유계약 선수로 풀어 버린다. 결국 장명부는 86년엔 인천을 떠나 대전 빙그레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하지만, 이미 퇴물이 된 그는 86년 빙그레에서 1승 18패로 최악의 성적을 냈다. 이에 빙그레에선 연봉 전액(7천5백만원)을 반환하라고 요구했지만 이미 그에겐 반액도 반환할 능력이 없었다. 지난 4년간 5억 9천만원이 넘는 돈을 한국에서 벌었지만 씀씀이가 너무 큰 탓에 빈털털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사기를 당하고 빚보증까지 서 결국 월세 20만원짜리 하숙집을 전전하는 신세까지 되어 버렸다.
 
빙그레에서 쫒겨난 그를 삼성의 박영길감독이 코치로 쓰려했으나 그의 나쁜 이미지 때문에 구단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다.
 
이후 서울의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투수를 지도하다가 88년 인스트럭터 자격으로 삼성의 투수들을 지도했지만 연봉문제로 끝을 내고 롯데 투수코치를 맞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91년 5월 마약상습복용으로 구속되며 쓸쓸히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직도 사람들은 삼미 슈퍼스타즈를 말하면 '너구리 장명부'를 떠올린다.
그만큼 당시 그의 활약은 프로야구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의 활약은 한국의 프로야구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주었다.

83년 그가 거둔 시즌 30승은 아직까지 원년 박철순의 22연승, 백인천의 4할타율과 함께 한국프로야구 불멸의 3대기록으로 남아있다.
 
◆1983년 장명부 성적

60경기 30승 16패 6세이브, 방어율 2.34,  427.1이닝, 388안타, 122사사구, 220탈삼진
 
 

 
롯데 자이언츠 장명부 선수가 머리를 단정하게 깎고 오자 권두조 선수가 우스갯조로
"형님, 새장가가도 되겠수'라고 장난치자, 파안대소하는 장명부의 표정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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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마일타운



대한민국 예능 역사상 이렇게 단기간내에 수많은 화제와 논란을 남긴 프로그램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각종 연예이슈의 최정점에 섰던 MBC '우리들의 일밤-서바이벌 나는 가수다'가 지난 27일 장장 165분간 특집방송을 끝으로 4주간의 짧은 1기 활동을 마무리했다.

나는가수다는 첫방송전부터 전문가수에 대한 서바이벌 방식에 대한 논란으로 찬반 양론이 격돌하며 화제를 모았다. 대체적인 반응은 가창력있는 가수들을 대상으로 한 첫서바이벌 형식에 대한 거부감이 아이돌이 아니면 음악프로에 등장하기도 힘들어진 한국가요계에 신성한 충격을 줄것이다는 찬성여론보다 6대4 정도로 우세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내노라는 가창력 있는 가수들의 혼신을 다한
열창이 이어진 첫방송후에는 분위기가 반전되며 폭발적인 호응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가수들의 노래도중에 인터뷰 장면을 내보내는 편집에 대한 논란이 일긴 했지만, 댄스위주의 아이돌그룹이 음악차트를 휩쓰는 현상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에서 가창력 있는 가수를 향한 시청자들의 목마른 갈증과 서바이벌 방식이 남긴 묘한 긴장감은 눈을 뗄수없을 정도의 흥미를 유발하며, 나는 가수다에 대한 호평이 쏟아졌다.


김건모,이소라,백지영,윤도현,김범수,정엽,박정현..

국내 최고의 가창력을 가진 가수들이 한자리에서 모여 노래하나에 혼신의 힘을 다한 열창에 전율이 흐를정도의 느낌을 얼마만에 감상해 봤을까..

첫방송이후 폭발적 관심을 반영하듯 나가수에 출연한 가수들의 노래들이 음악차트를 휩쓸었다.
관심이 급증하자 각종 수많은 추측성 스포일러들도 쏟아져 나오고, 급기야 조작논란까지 일게 되었다.

3주차 방송이 끝난후에 나는가수다에 대한 찬반여론이 또다시 급변했다. 출연진들이 7위를 한 김건모의 탈락에 대해 눈물을 보이며 처음임을 감안해 한번의 재도전 기회를 줘야한다고 했고, 이에 대해 김영희PD는 제작진과의 긴급회의끝에 김건모에게 재도전기회를 선택하도록 배려해줬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 서바이벌 방식을 뒤엎는것이 되어 방송후 많은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시청자들은 실력이 있어도 빽없으면 출세하기 힘든 공정하지 못한 국내의 현상황에서 예능프로에서만큼은 털끝만큼의 오류도 없이 공정하길 바랐던 것일까..

김건모 재도전 논란으로 연일 비판이 더욱 거세지면서 김영희PD는 경질되고 후임 심정수PD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재정비될때까지 한달간 방송중단 선언까지 지난주 방송의 후폭풍을 거세게 맞았다.

27일 165분간 특집으로 꾸며진 
MBC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는 방송 첫화면에 시청자들을 향한 제작진의 공식사과로 시작했다.

이는 탈락자 재도전 규칙으로 야기된 논란에 대해 제작진이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MBC는 자막을 통해 "시청자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심려를 끼쳐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앞으로 시청자 여러분의 염려와 질타를 겸허히 받아들여 더 좋은 무대로 보답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가수 7명이 서로의 노래를 바꿔불렀다.
첫 번째 무대를 장식한 이소라는 평소 묵직했던 저음에서 한껏 힘을 뺀 ‘나의 하루’를 뉴욕 재즈보컬풍으로 선보였다.

두 번째 도전자인
베테랑 가수 백지영은 긴장한 탓에 리허설 무대에서 멍하니 서 있다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백지영은 컨디션 난조에도 불구하고 김범수의 ‘약속’을 자신만의 애절함으로 표현해내 박수갈채를 받았다.

재도전 논란으로 거센 비판을 받았던 김건모는 공연에 앞서 "청중평가단과 시청자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겠다"라며 “재도전할 수 있게 용기를 북돋워준 후배들에게 감사하다. 보답하는 것은 이 무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라고 사죄의 뜻을 전했다. 정엽의 ‘유아 마이레이디’를 부른 김건모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여유와 재치를 버렸다. 대신 관록이 묻어나는 진지함과 노련함으로 무대를 장식했다. 데뷔 20년차 가수 김건모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부르르' 손떨림을 보이며 열창했는데 여느 가수보다 큰 호응을 얻었다.

4번타자였던 김범수의 무대는 말이 필요없었다. 이소라의 ‘제발’은 김범수표 발라드로 재탄생해 청중평가단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매니저인 박명수가 청중평가단의 박수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김범수를 맞이할 정도로 그의 노래는 강렬했다.

대한민국 대표 록커 윤도현은 백지영의 히트곡 ‘대시’를 강렬한 록버전으로 선보였다. 13년만에 함께 무대에 선 전 YB기타리스트 유병용과 함께 한 공연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박정현은 김건모의 ‘첫인상’을 뜨거운 라틴댄스곡으로 승화했다. 박정현표 ‘첫인상’은 잔잔한 1절과 극적인 2절의 대비를 살려 마치 한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했고 그의 퍼포먼스는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트공연을 연상케 했다.

마지막을 장식한 정엽의 ‘잊을게’는 대한민국 대표 소울 가수의 자존심을 살린 무대였다. 중간평가에서 7위를 차지했던 정엽은 강렬한 록음악인 ‘잊을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냈다.


7
인의 가수들은 일곱가지 빛깔로 주말 저녁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한 명, 한 명의 무대가 끝날 때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165분간 특집방송으로 진행된 3월 27일 방송 이후 사람들의 반응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노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무대에 서는 그 과정이 얼만큼 힘든지 제대로 보여준 가수들에게 찬사가 이어고 있다.

165분간 특별방송된 나는가수다 TV시청률은 13.7%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28일 시청률 조사회사 AGB닐슨미디어리서치에 따르면 지난 27일 방송된 '나는 가수다'는 시청률 13.7%를 기록해 19.8%의 시청률을 보인 KBS 2TV '해피선데이'에 이어 일요 예능 2위를 차지했다. 특히 '나는 가수다'는 김건모의 재도전과 김영희 PD의 하차 등의 논란 속에서도 높은 시청률로 일요 예능 최강자 '해피선데이'를 위협했다. 한편, 동시간대 방송된 SBS '일요일이 좋다'의 '런닝맨'과 '영웅호걸'은 각각 시청률 11.2%, 5.1%를 기록했다.

방송직후 시청자들은 "많이 아쉽습니다. 빨리 돌아오길 바랍니다","좋은 프로그램은 롱런해야 합니다", "20년차 대가수가 손을 떨며 노래하는데 너무 돌을 던진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련하다", "왜 이렇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도 급급했던걸까요", "한번 더 지켜볼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즉각적으로 비판하고 돌을 던진 네티즌들의 나쁜 예를 한번 더 본 것 같네요",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을...", "이날 방송 많이 다듬어서 내보낸 티가 나네요", "이 프로그램은 예능이 아니라 예술입니다. 열정의 산물인 이 프로그램이 꼭 돌아오길 바랍니다" 등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시청자들은 너무 성급했던 쌀집아저씨 김영희 PD의 교체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며, 감동의 여운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네티즌들은 김영희PD가 

방송장악저지 반MB 노조에 수장이다 보니까 이명박 낙하산 김재철MBC사장에 의해 일방적으로 짤렸다며 울분을 토로하고 복귀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엄기영의 퇴진 직후, 전형적인 MB 계열의 김재철 사장이 '낙하산'처럼 떨어진 뒤 김영희 PD는 "MBC가 언론으로서 독립성과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고는 했다. 그는 김재철 사장의 부임 전후로 벌어진 MBC 노조 파업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김재철 사장 부임 직후에는 MBC 부사장 임명건을 두고 김재철 사장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이런 갈등 속에서 김영희 PD가 나가수로 '직격탄'을 맞자 김재철 사장이 일방적으로 경질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절차를 모두 생략한 채 이례적으로 강압적인 '퇴진 결정'을 통보한 것은 김영희 PD의 회생 의지를 꺾어버리겠다는 MBC 윗선의 보이지 않는 손과 관련이 있다. 한 쪽에서 이번 경질을 두고 "이런 식으로 보복성 인사를 하다니..." 라며 불만을 토로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가수다'는 김영희 PD에서 신정수 PD로 제작진이 교체되어, 4월 한달간 결방될 예정이다. 
MBC '우리들의 일밤'은 4월 3일 방송분에서 '신입사원'을 2시간 45분 동안 방송할 예정이고, 결방하는 기간 동안 태국에서 열린 '한류 콘서트'도 내보낼 방침이다.

나는가수다의 한달간 결방이 아쉽지만, 비온뒤에 땅은 더욱 단단해지듯이
혼신의 힘을 다한 가창력있는 가수들의 열창을 볼수 있는 나는가수다가 명품예능으로서 발전해 나갈수 있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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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마일타운

난감

덩달이가 숙제때문에 난감해 있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숙제를 끝내버렸다.

"난 감사드렸어~~" ♩ (윤종신 노래)



아쭈구리

덩달이가 구석에 틀여박혀서 숙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자,

그걸 보신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덩달아! 쭈그리고 앉지 말랑께롱!"



애국심

덩달이의 여자친구 국심이가 덩달이네 집에 놀러왔다.

덩달이 할머니가 그걸 보시고는,

"얘, 덩달아, 문 앞에 국심이 왔다."



어거지

덩달이가 종로에 놀러갔다.

지하도를 내려가는데, 거지가 엎드려 구걸을 하고 있었다.

"어? 거지네?"



왕짜증

덩달이가 형과 함께 수영장엘 갔다.

형이 런닝셔츠를 벗어버리자 형의 배를 보고있던 덩달이가,

"형, 배에 왕짜 증말 선명하다..."



우리집 만세

비오는 날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덩달이가 불평하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우리집만 새!"



의아심

하루는 덩달이 국어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지 않았다.

집에서 빈둥거리던 덩달이,

"으아 심심해!"



인내심

덩달이가 새로산 샤프심을 덩달이 동생이 몰래 쓰고 있었다.

그것을 본 덩달이...

"인내, 심!"



자신감

덩달이 어머니가 덩달이 할머니께 수정과를 드렸다.

덩달이 할머니가 수정과를 들이키시며 하는 말,

"어멈아, 위에 떠 있는게 잣인감?"



자유

덩달이 아버지가 개똥이 아버지에게 꿔간 돈을 갚으며 말했다.

"개똥이 아버지, 자유..."



잠자리

덩달이의 짝궁이 글짓기 발표를 했다.

빨간 고추 잠자리가 파란 하늘 위를 날아다닙니다.

옆에 있던 덩달이도 발표를 했다.

잠자리가 편해야 사랑받는 거라구...



죽일래

숙제에 시달린 덩달이가 앓아 눕게 되었다.

할머니가 죽을 끓여 주셨는데, 덩달이 동생이 그걸 몰래 먹고 있었다.

덩달이가 그걸 발견하고는,

"얌마, 죽 일내!"



찬송가

덩달이가 하교길에 소 한마리를 보고는 드립다 걷어차고는 도망을 쳤다.

그런데, 소주인이 그 소를 데리고

덩달이 집까지 찾아와서는 덩달이 할머니에게 따지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하시는 말,

"덩달아, 이 소가 니가 아까 찬송가?"



책임감

덩달이 할머니가 덩달이 책가방을 열어보며 말씀하셨다.

"이거이 덩달이 책인감?"



초보자

덩달이네 마을이 갑자기 정전에 되었다.

1시간 동안이나 헤매다가 겨우 양초를 찾아냈다.

옆에서 같이 양초를 찾고 있던 할머니가 덩달이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초 보자."



카레

덩달이 어머니께서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이고 계셨다.

덩달이가,

"엄마, 손가락 다쳤어요?"

그러자, 어머니 왈

"응, 칼에 베었어."



팔배게

덩달이 동생이 숙제를 하다가 덩달이에게 물어보았다.

"덩달성, 팔백에서 삼백을 빼면 얼마여?"



아이 씨팔로미

덩달이가 하교길에 외국인을 만났다.

"저어 덕수궁엘 가려면 어떻게 가죠?"

대단한 덩달이가 영어로 대답하길..

"I see. Follow me ( 아이 씨 팔로미)"



불러줄까?

군에 있던 덩달이 모처럼 휴가를 나와 여인숙에 하룻밤 묶게 되었다.

주인여자, 덩달이 방에 들어와 이불 밑에 손을 넣으면서 하는 말

주인여 : 적적하지... 불러줄까?

돈이없던 덩달이.

덩달이 : 괜찮아요.

주인여 : 에~그 불러줄께.

덩달이: 정말 괜찮아요.

그날 밤 덩달이는...

얼어 죽었습니다.



안기부

덩달이가 학생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잡혔다.

경찰은 그가 북한과 접촉한다는 사실을 일부 자백 받고 그를 안기부로 넘겼다.

안기부 취조실…

무섭게 생긴 거구의 남자가 덩달이에게 오더니 덩달이 머리를 주먹으로 '퍽' 하면서 쳤다.

덩달이가 열받아서 그 거구를 쳐다보자 거구가,

"왜? 기분 나쁘냐?" 라고 물었다.

그러자 덩달이가 하는 말,

"안 기분 나빠요!"



탐색기의 비밀

어느 날,빌게이츠가 컴퓨터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빌게이츠가 존나 싫어하는
탐 크루즈가 해방을 놓고 지랄을 떨었다.

그래서 빌게이츠는 사람들 몰래 컴퓨터에 탐 크루즈의 욕을 썼으니..

그것이 바로..
 
탐색기(탐새끼)



하여간

심심한 덩달이, 라디오를 틀었다.

"어? 서태지의 하여가네?"





덩달이 삼촌이 찾아오셨다.

"덩달아, 요즘 핵교 잘 댕기냐?"



활기찬

덩달이 어머니가 성경책을 읽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사...

그걸 듣고 있던 덩달이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부활?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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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마일타운



경찰이 된 사오정이 순찰을 도는중 소매치기가 어떤 아줌마의 지갑을 홈쳤다.

아줌마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소매치기 잡아라! 도와주세요!"

이에 분개한 사오정은 날쌔게 달려가 소매치기를 잡고 한마디.

"아저씨, 죄송한데요~ 저 아줌마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요?"

90년말 KBS 2TV에서 방영됐던 허영만 원작의 만화영화 '날아라 슈퍼보드'에서 첫선을 보인 사오정.

지난 봄에 혜성같이 '유머계'에 등장해서 최불암, 만득이, 펩시맨 등의 쟁쟁한 호적수들을 물리치고 작년 여름 유머계를 평정했다.

천리안,하이텔,나우누리등 각 통신사에서 올라와 있는 그의 얘기만도 수천여건에 달했으며 그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이버공간에서는 IMF시대에 우리의 영웅인 사오정이 퇴출위기에 몰리고 있다.

반짝 인기에 이어 소재 고갈에 시달리다 과거이야기의 패러디를 거쳐 사라지는 시리즈 유머의 생성소멸과정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

'썰렁함의 미학'은 썰렁해지는 순간 퇴출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

현재까지 사오정은 청각이 좋지 않으며, '뭐라고(高)'를 졸업하고 '뭔대(大)'에 재학중이며 '다시 한번 말해바'를 즐겨 먹고 '안들려요'를 깔고 잔다고 알려져 있다.

군시절엔 고참이 PX에서 '빵하나, 우유하나' 사오라고 하니 '빠나나 우유'를 사오기도 했고, '반성문'을 써오라는 말에 '방독면'을 쓰기도 했으며, 국군장병 위로프로인 '우정에 무대'의 장기자랑시간엔 불려나가 "어떤 재주가 있으신지요?"라는 질문에 “뒤에 계신 어머니는 저의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라고 대답한 화려한(?) 경력도 있다.

사오정이 인터넷상에서 대중성을 확보한 첫케이스.


TV를 보던 사오정.

"오정이형, 냉장고에 있는 우유 마셔도 돼?" 라는 동생의 물음에 묵묵부답.

동생은 다시 물었다.

"형,우유 먹어도 되냐고?"

사오정은 귀찮다는 듯,

"야! 글쎄 넌 가서 우유나 마셔!"

그뒤 사오정은 자신의 친구들과 함깨 카페에 들어가서는,

사오정1 : 난 우유.

사오정2 : 그럼 난 우유.

사오정3 : 그럼 나도 콜라.

사오정4 그럼 사이다 네잔 주세요~

주문받던 사오정 웨이터 왈.

"손님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에선 율무차가 안 되는데요."

푹푹 찌던 'IMF더위'를 특유의 썰렁함으로 식히며 인기몰이에 성공한 사오정은 그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몇몇 TV프로와 많은 CF에 출연했다.

국군장병 위로프로인 "우정에 무대"의 장기자랑시간에 불려나가 어떤 재주가 있으신지요?”는 질문에 “뒤에 계신 어머니는 저의 어머니가 확∼실합니다!!”라고 대답한 일화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너무나도 잘 알려진 경우이고, 'TV는 사랑을 싣고'에서는 “누구를 찾아 나오셨습니까?”라는 물음에 흰봉투를 꺼내들고 "4만원 벌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핸드폰 광고에는 '겹치기 출연'했다.

촬영중 소나기를 피하던 사오정에게 "삐리리릭~!" 하고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인은 "여보,잠깐만!"하며 사오정 아기의 입에 수화기를 갖다 댄다.

"아빠 해봐! 아빠!" 잠시 뜸을 들이던 사오정 아기의 입에서 터져나온 첫마디.

"아빠빠빠빠~!"

사오정은 멋쩍은 듯 주위 사람에게 말한다.

"오빠래요~"

다른 핸드폰 광고에서는 사오정이 삼장법사와 대나무 숲속을 걷고 있을 때 울리는 핸드폰. “삐리리리리∼.” “세상을 떠나 있고 싶을 때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대사를 하게 돼있던 사오정이 삼장법사를 번쩍 들쳐안고는 절벽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는 주저없이 뛰어내리며 이렇게 외친다.
 
“본부! 탈출한다!”

그밖에 롯데리아, 파워에이드, 맥도날드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CF에 출연했다.

그런데 CF를 찍을 때마다 사오정이 너무 많은 실수를 해서 CF감독이 오버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자, "알았다 오바!"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하니 사오정이 나오는 CF 감독들의 고충을 알 만하다.

한편으로 인기연예인들이 그렇듯이 사오정 역시 많은 스캔들에 시달리기도 했다.
 
사오정이 매력적인 여성과 사랑에 빠져 오토바이를 타고 드라이브를 나갔다.

한밤의 공기는 싸늘했고 얇은 옷차림의 애인은 사오정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자기, 나 추워!” 한여름인데도 가죽잠바를 입고 터프하게 오토바이를 몰던 사오정이 씩 웃으며 한마디.

“그래,나도 너 사랑해!”

정작 사오정 자신은 자신의 사오정 시리즈를 듣고 사람을 너무 비하하는데 격분해하며,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야! 앞으로 손오공 형 욕하면 죽어!!"

현대인의 대화단절과 남의 얘기를 멋대로 왜곡하는 세태를 꼬집었던 사오정. 너무 빨리 떴기 때문일까?

'역전 보청기집에서 보청기를 구입했다', '묵은 귀에지를 파냈다'는 등 그의 ‘존재의 이유’에 대한 부정과 함께 퇴출론이 나오고 있다.

현재‘버전 업’된 그의 소식도 PC통신 유머란에 가끔 올라오고 있긴 하지만 기존의 이야기에 사오정을 대입해 흉내만 낸 정도.

기상천외한 엉뚱한 행동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IMF 시름을 잊게 했던 사오정.
 
사오정시리즈 유머는 시들어가지만, 앞으로도 사오정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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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스마일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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